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웨이친 (문단 편집) == 최후 == 1937년 11월 22일 4대대장 [[가오즈항]]의 사망 이후 21중대장 겸 부대대장이었던 리구이단이 4대대장으로 임명되자 부대대장 겸 21중대장으로 임명된 둥밍더(董明德)와 더불어 웨이친은 21중대의 부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파일:0eb30f2442a7d9331dbcc3a9af4bd11372f001d7.jpg]] 탈출하는 웨이친을 묘사한 그림. 이후 12월 3일 상관인 둥밍더와 함께 2기의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에 나눠타고 난징의 비행장으로 이동해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일본 해군의 항공기들이 비행장을 공습해오자 둥밍더의 기체와 출격하여 11기의 96식 함상전투기를 상대로 교전을 벌이다 난징 인근의 치샤산(栖霞山)에서 피탄당해 탈출했으나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추락사, 또는 탈출 도중 머리에 총격을 맞아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둥밍더가 확인했는데,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웨이친은 12월 1일 난징 항공전에서 소련 항공 지원대와 함께 일본 해군 13항공대를 상대로 교전을 벌이던 중 자신의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이 고장나 12월 3일에는 둥밍더의 [[I-16]]에 탑승했고, 12월 3일에는 일본측의 교전 기록이 없으나 12월 4일 무토 가네요시(武藤金義)가 탑승한 95식 함상공격기가 I-16을 격추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웨이친이 사망 당시 탑승하고 있었던 기체도 [[I-16]]이라는 주장도 있다. 웨이친의 일화는 당시 소학교 교과서에서 언급될 정도였으나 [[국공내전]]에서의 국민당의 패배 이후 [[국민혁명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매장되어 잊혀졌다가 [[양안관계]]의 회복으로 중일전쟁 당시 국민혁명군 출신자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1990년대에 다시 복권되었으며, 출생지인 쓰촨성에는 웨이친을 기리는 기념관이 설치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