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웨이리황 (문단 편집) === [[국공내전]]과 말년 === 1948년 1월 위장병이 악화된 [[천청]]을 대신하여 동북초비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3월 동북행영 정무위원회 주석을 겸하게 되었다. 웨이리황은 심양에서 [[린뱌오]]의 홍군과 싸웠으나 심각한 물자부족으로 전황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장제스는 웨이리황에게 심양의 포위를 돌파하라고 지시했으나 군관회의도 소집할 수 없을 정도로 전황이 급박해지자 결국 비행기를 타고 호로도로 퇴각해야 했다. 장제스는 웨이리황이 지휘부서에서 늑장을 부려 기회를 상실하고 중진을 잃었다는 이유로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화북초비총사령 겸 베이핑 시장 [[푸쭤이]]는 그를 베이핑의 초비총사령부에 구금하였다. 이때 미국 망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난징으로 이송되었다. 장제스는 웨이리황이 만주를 잃은 것을 혹독하게 질책했고 웨이리황은 장제스가 자신의 지휘권을 존중하지 않은 것을 항의했다. 격노한 장제스가 웨이리황을 총살시키라고 지시했으나 [[쑹메이링]]의 만류로 철회되었다. 11월에 모든 직책에서 면직되고 가택연금 당했다. 1949년, 난징이 함락되자 [[국부천대]]에 동행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사업의 실패로 생활고를 겪게 되자 1955년 3월, 베이징으로 돌아와 중화인민공화국에 투항하였고 1956년 정협위원 겸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상무위원에 초빙되었다. 1959년 4월 2기 전인대 대표로 선출되었고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1960년 1월 17일, 베이징에서 심장 동맥 질환으로 사망했다. 이후 [[팔보산 혁명공묘]]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