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자바오 (문단 편집) === [[중국 총리|총리]] 기간 === 총리 시절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중국 인민들에게 인기를 끌었는데, '''[[부정부패|부패]]의 최고 해법은 [[민주주의]]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원자바오는 "민주와 법제, 자유, 인권, 평등, 박애 등은 [[자본주의]] 특유의 것이 아니라 세계 역사 발전 과정에서 중국에도 형성된 성과이며 인류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가치관"이란 것을 강조하며 서방식 민주주의가 아닌 '''중국식 사회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입장이다.[* 물론 본질적으론 민주주의에 좀 더 가깝게 가자는 말이라 이조차 거부하는 반대파들 견제를 고려한 말장난일 수도 있다. 사실 원자바오가 중국식 민주주의를 주창할 것도 없는게, 이미 중화권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영웅 취급받는 [[쑨원]]이 제시한 중국식 [[삼민주의]]가 있다. 하지만 원자바오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은 쑨원의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수립된 정권이기 때문에 쑨원 개인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삼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하여튼 이 중국식 사회 민주주의마저 후진타오-원자바오 시대 이후부턴 무너지기 시작해, 아니나다를까 중화인민공화국은 마오쩌둥 이후 다시 [[시진핑|일인 철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원자바오는 위의 사진에서도 나와있지만 당시 천안문 시위대의 요구에 우호적이었던 [[자오쯔양]] 서기의 최측근이었고, 자오쯔양은 장쩌민에 의해 좌천된 후 무수한 회유를 받았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지 않았던 사람이니만큼, 어느 정도 민주적인 개혁에 우호적인 사상을 가졌을 개연성은 있다. 이후에도 사회 국가주의적 성향이 짙은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과 대립되는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왕양 광둥성 서기의 광둥 모델을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20827011005969|적극 띄우는]][* 기사에는 경제적인 측면만 나와있지만, 광둥 모델은 정치적 측면에선 민주주의 요소를 상당히 가지고 있다.] 등 지속적으로 본인의 성향을 유지했다. [[파일:attachment/Corbis-42-20086446.jpg]] 원자바오는 오래 된 국산 운동화를 즐겨 신고 버스를 타고 다니는 등 '서민 총리'로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했을 땐 쓰촨 성으로 직접 날아가서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2011년 4월에 [[중국]]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고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471352|비판했는데]], [[중국 공산당]] 기관지가 2012년에 들어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5450037|도덕적 상태가 양호하다고 반격]]했다. 뭔가 국민들에게 인기는 있는데 인기에 비해 실세 라인은 아닌 모양(...). 원자바오가 후진타오 계열인 [[공청단]]과 그나마 가깝다고는하나 파벌 싸움에서 거의 언급이 되지 않고 중립인걸 보면 딱히 조직을 만들지 않는 성격인 듯. 상하이 서기를 지내며 상하이방을 만든 장쩌민, 푸젠과 저장에서 오래 근무하며 자기 사단을 만든 시진핑과 달리 원자바오가 당중앙에서 주로 원로들을 모시며 참모 역할을 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원로들의 그늘 아래에서 자기 세력을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기도 했을 것이다. 2012년 [[전인대]]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523535.html|정치개혁]]을 강조했다. 아마 중국 내 구태 [[정치인]]으로 대표되는 [[보시라이]][* [[홍위병]] 출신이기도 하다.] 등 몇몇 [[수구파]]를 겨냥한 발언인 듯 하다. 임기 말에 이렇게 추진하는 거 보면 정말 개혁을 뼈저리게 느끼는 듯. 다만 그의 의도를 달리 보는 해석도 있는데, [[보시라이]]로 대표되는 태자당 가운데서도 좌파 + 국가 중심주의 노선이 떠오르자 공청단의 힘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서 자신의 최강점인 청렴을 통해 (혹은 태자당의 최약점인 부패를 통해) 공산당의 신주류가 될 태자당 세력을 미리 견제한 것이라는 견해다. 즉, 후진타오가 직접 하질 못한 걸 총리가 나섰다...라는 이야기고, 이 가설이 맞다면 '''보시라이 [[숙청]]을 주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시진핑]] 역시 태자당 우파로서 보시라이가 부담이었는지 결국엔 그의 해임에 동의했다. [[파일:G4F86dI.jpg]] [[일본]]에서 [[도호쿠 대지진|그 일]]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있은 후]],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간 나오토]] 총리가 [[후쿠시마]]산 [[오이]]를 [[먹어서 응원하자!|대접해 먹었다.]] 원자바오 총리는 딱 한 입만 베어 먹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일단 주어진 양은 다 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