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자바오 (문단 편집) === 총리 전 === 베이징 지질학원을 졸업하고 공산당 관료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원자바오는 1968년부터 82년까지 14년간 내륙 오지인 간쑤성에서 지질조사 업무를 맡았다. 오지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업무를 하면서도 성실하게 일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모습이 간쑤성 서기였던 [[쑹핑]][* 이후 당 조직부장을 거쳐 정치국 상무위원직까지 역임한다. 같은 방식으로 쑹핑의 주목을 받아 간쑤에서 발전소 업무를 하다 발탁되어 초고속으로 승진한 인물이 이후 원자바오와 함께 짝을 이루게 되는 [[후진타오]]다. 다만 공청단 중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당중앙의 비서직에 배치된 원자바오와는 달리 후진타오는 공청단 제1서기직을 역임한 후 구이저우와 티베트의 성위서기를 맡으며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걷게 된다. 때문에 둘은 같은 공청단파에 속하면서도 정치적인 입장과 배경은 미묘하게 다른 편.]과 쑨다광 지질광산부장의 눈에 쏙 들어 81년 간쑤성 지질국 부국장으로 영전한 뒤, 82년에는 지질광산부 정책법규연구실 주임으로 임명되어 중앙에 진출하고, 83년에는 지질광산부 부부장(차관급)까지 올라오며 초고속 승진가도를 걷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파격적인 승진인데, 원자바오의 승승장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85년에는 당 간부들의 평균연령을 낮추기 위해 젊은 유망주를 찾고 있던 총서기 후야오방의 눈에 들어 총서기를 수행하는 비서실인 중앙판공청 부주임직에 임명되었고, 86년에는 만 44세의 나이에 총서기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격인 중앙판공청 주임을 맡게 된다. 1987년 10월, 1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를 맡으며 중앙서기처에까지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원자바오의 커리어는 변곡점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를 발탁한 후야오방이 실각하고 그 후임인 자오쯔양이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다고 축출당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자오쯔양 [[총서기]]의 측근이었던 원자바오는 유혈진압을 앞두고 시위대를 말리던 자오쯔양 서기를 수행하며 외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파일:external/imgs.ntdtv.com/p6384002a229564480.jpg|width=500]]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당시 [[자오쯔양]] 총서기. 옆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바로 원자바오이다.[* 이때 자오쯔양의 한 말이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시오!"였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자오쯔양은 막후 실세 [[덩샤오핑]]에 의해 당 총서기직에서 해임됐고, 이후 종신 가택연금을 당해 죽기 직전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원자바오는 그의 상전인 자오쯔양이 가차없이 숙청되었음에도 중앙판공청 주임 직에 계속 유임되었는데, 이는 원자바오의 능력을 높게 본 덩샤오핑의 조치였다고 한다.[* 후야오방은 공청단의 거두였고,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가차없이 숙청당했으니 후야오방의 직계인 공청단 출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등도 당연히 밀려나는 게 정상적인 수순이었겠으나, 어찌보면 중간에 끼인 실무진이자 당의 미래였던 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 보수파 원로들조차도 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의외로 이들은 보호를 받으면서 4세대 최고지도부로 등극하게 된다.] 자오쯔양이 해임된 뒤 장쩌민이 총서기가 된 뒤에도 원자바오는 93년까지 중앙판공청 주임 직을 계속 수행한다. 정치적 격량의 와중에 세 명의 총서기를 모시면서도 자리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원자바오가 처세에 무척 뛰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에 선출되었으나 이때부터 원자바오의 출세길은 완행도로로 옮겨가게 된다. 다음 해인 93년에 중앙판공청 주임에서 당 농촌공작영도소조 부조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당내서열상으로는 승진이 맞았으나 당중앙의 모든 주요업무와 기밀을 한손에 틀어쥔 중앙판공청 주임에서 농촌공작영도소조 부조장으로의 이동은 명백한 좌천성 영전이었다. 장쩌민이 상하이 서기 시절의 동료들을 불러들여 상하이방을 구축하던 시기였고 공청단으로 계파가 다른 원자바오가 밀려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 장쩌민에게 중앙판공청 주임 원자바오는 말이 비서실장이지 사실상 당 원로들이 박아놓은 감시역이나 마찬가지였던지라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원자바오의 후임 주임으로는 장쩌민의 장자방으로 불리며 시진핑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이후 엄청난 활약을 한 장쩌민의 최측근, 쩡칭훙이 부임해오게 된다.] 그러나 원자바오는 위기를 기회로 바꿔 당시 조장이었던 상무부총리 [[주룽지]]의 신임을 얻고 상하이방과도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며 다시 기회를 잡게 된다. 때문에 원자바오는 공청단 출신이면서도 장쩌민을 지근거리에서 모셨고, 주룽지의 지명을 받아 총리가 되는 등 상하이방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립파로 분류되게 된다. 1997년 5월, 15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되었다. 1998년부터 농업, 상업 담당 [[중국 국무원|국무원]] 부총리를 맡으며 이례적으로 중앙서기처 서기와 부총리를 겸하게 된다.[* 원래 국무원 업무와 당 업무는 같이 맡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부총리직을 맡으면서도 서기처 서기 직을 유지하며 중앙당 업무에도 깊게 관여했다는 것은 원자바오의 권한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1998년의 장강 대홍수에서 제방을 무너트려 대도시를 지켜야 한다는 건의를 받았음에도 제방 파괴를 보류하고 수위가 하락할 때까지 지켜보도록 한 신중한 판단으로 많은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중국 공산당]] 내 여러 요직을 거친 뒤에[* 다만 원자바오는 쑹핑의 눈에 들어 간쑤를 떠난 뒤 20년을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 지도부 입성의 필수요건으로 일컫어지는 지방 성장, 서기직을 전혀 지내보지 못했다. 다만 그런 약점은 후보서기부터 해서 중앙서기처에 15년씩이나 있었고, 권부핵심의 중앙판공청 주임을 7년이나 지냈기 때문에 상쇄될 수 있었다. 공청단 중앙에서 활동하며 지방 실무를 경험할 기회가 적었던 다른 공청단 관료들과는 달리 간쑤성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업무를 하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물이기도 하고.] [[주룽지]]의 추천을 받아 후임으로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가 되었다. 다만 동남 연해지방에서 경력을 쌓고 경제분야 차르라는 별명까지 얻은 경제전문가로서 과감한 시장경제 도입을 통한 개혁개방을 강조했던 주룽지와는 달리, 원자바오는 서북지방인 간쑤에서 초기 경력을 쌓았고 농업과 광업 전문가로서 속도조절과 균형발전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전임과 정책방향의 차이는 있는 편.[* 이는 선부론에 의거해 동남 연해지방이 성장을 주도했던 장쩌민 시기와는 달리, 서부 내륙지방의 균형발전에도 신경쓰며 지역간 빈부격차의 심화를 완화해 보려는 공산당 지도부의 의도가 담긴 인선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후진타오도 상하이 서기 출신인 장쩌민과는 달리 간쑤성에서 초기 경력을 쌓은 뒤 구이저우와 티베트 서기를 지냈다.] 상무위원단 내 서열은 통상적으로 총리가 맡던 2위가 아닌 3위였는데, 이는 공청단 출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실질적인 서열 1위와 2위를 독점하는 대신 형식적인 서열 2위 자리는 상하이방의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에게 돌아가도록 한 계파별 안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