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수(계급) (문단 편집) ===== [[조선군]] ===== [[파일:external/file.dailian.co.kr/news1248760945_165501_2_m.jpg|width=50%]] ▲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팔도도원수 [[충장공]] [[권율]]. 조선군 또한, 유사시 지방 각 도의 군사령관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들을 총괄할 임시직으로써의 [[도원수]], 그리고 이를 보좌할 [[부원수]] 제도를 운영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의 팔도 도원수 [[권율]]이 좋은 예다. 임시직이다보니 도원수의 지휘 범위는 몇 명의 병마절도사들을 통솔하는지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같은 큰 전쟁에서는 전국 8도의 조선 육군 전체를 지휘하는 팔도도원수가 등장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변란이 일어난 일대의 병마사들만을 지휘했다. 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사령관으로써의 원수 직책이 복구됨을 의미했다. 특히 임진왜란에서 등장한 [[권율]]의 '''팔도 도원수''' 직책은 조선군 전체를 지휘하는 야전 총사령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상대적으로 고려에 비해 중앙집권이 강화됨에 따라, 도원수 위에는 [[도체찰사]], 도순무사, [[체찰사]] 같은 [[재상]]이 임명되는 중앙 직속의 상위직이 또 있었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 초기에는 4명의 도체찰사가 도원수 1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등 경직되고 혼란한 지휘체계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곧 개선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체찰사와의 상하관계 문제는 남아있었고, 이는 정유재란 당시 문제를 초래한다. 야전과 농성전에 관한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의 상충되는 의견으로 인해 경상우도의 방어선이 붕괴한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도도원수 직책의 등장과 강화는 전쟁의 대부분의 시기에 조선의 반격 및 명군과의 합동작전에서 조선 육군이 보다 더 원활한 행동이 가능하게끔 지휘체계를 개선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군과 [[다이묘]]별로 나뉘어 협동작전조차 제대로 되지 않던 일본군에 비해 이는 확실한 우위였다. [[파일:이순신.jpg|width=50%]] ▲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한편 [[조선 수군]]의 경우, 임진왜란 시기에 신설된 수군 총사령관직인 [[삼도수군통제사]], 정묘호란 이후 설치된 삼도수군통어사가 육군의 도원수직과 유사하다. 특히 삼도수군통제사는 조선 수군의 군령권과 군정권, 하삼도의 [[수군절도사]]들 전체와 주력함대 절대 다수, 그리고 그 방어진들을 전부 통할하는, 사실상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막강한 직위였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다만 통제사는 도원수와는 달리 상설직이었다. 품계도 도원수가 정 2품인 반면,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이라는 차이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