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원수(계급) (문단 편집) ===== [[고려군]] ===== [[파일:윤관 표준영정.jpg|width=50%]] ▲ 여진 정벌 당시 고려군 별무반 행영대원수 문숙공 [[윤관]]. 왕조 전기의 [[고려군]]은 [[당나라군|당 전기의 율령 군제]]를 도입하여 유사시 변란이 일어나거나 타국 침공을 위한 원정이 결정될 시 경군(京軍)이[* 중앙군인 2군 6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반면 지방군인 외군(外軍)으로는 5도에 주현군, 양계에 주진군이 있었다.] 모여 전, 후, 좌, 우, 중의 오군으로 개편되었고, 그 사령관으로서 '''원수(元帥)''', 그리고 부사령관으로 '''부원수(副元帥)'''가 임명되었다. 이 편제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이 [[고려의 여진 정벌|여진족 정벌]] 당시의 [[별무반]]의 편제로, 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 및 그 참모진들이 이끄는 행영[* 야전사령부.] [[원수부]] 아래, 각 병마사(兵馬使)들의 5개 군이 동원되었다. ||<-3> '''{{{#670000 고려 별무반 행영 군단}}}''' || ||<-3> '''{{{#670000 대원수(大元帥)}}}''' || ||<-3> '''{{{#670000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윤관]]}}}''' || ||<-3> '''{{{#670000 부원수(副元帥)}}}''' || ||<-3>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 [[오연총]]''' || ||<-3> '''{{{#670000 판관(判官)}}}''' || ||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 || '''병마판관(兵馬判官) 황군상''' ||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 || ||<-3> '''{{{#670000 기타 지휘관}}}''' || || '''녹사(錄事) [[척준경]]''' ||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 ||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 || ||<-3> '''{{{#670000 병과}}}''' || || '''신기군(神騎軍)''' || '''신보군(神步軍)''' || '''발화군(發火軍)''' || || '''도탕군(跳盪軍)''' || '''경궁군(梗弓軍)''' || '''정노군(精弩軍)''' || ||<-3> '''항마군(降魔軍)''' || ||<-3> '''도합 170,000 명''' || [[파일:태조 어진.jpg|width=50%]] ▲ 고려 무장 시절 고려군 동북면도원수였던 조선 [[태조 이성계]]. [[파일:external/www.han-style.com/pic_choiyoung_01.jpg|width=50%]] ▲ 고려군 팔도도통사 무민공 [[최영]]. 이렇듯 고려 전기와 중기의 원수란 요즘으로 치면 야전군 총사령관, 부사령관에 상당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원수는 특정 지역의 방위를 맡은 사단장급 사령관으로 변화한다. 전기 고려군은 문벌귀족의 전횡과 요나라와의 전쟁을 거치며 약화되어 왔다. 이 때문에 여진족이 준동하던 12세기에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정규군조직이 아닌 별도로 [[별무반]]이라는 기존 군제와 독립된 특설임시조직을 만들면서 별호제반에 의존하는 국방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미 이 때부터 기존의 2군 6위 체제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정벌 후에도 12세기 내내 이어졌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그리고 [[무신정변]]은 별무반을 통해 간신히 다시 끌어모은 고려의 국방력이 재차 소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조위총의 난|조위총이 북부지방의 주진군을 모아 중앙군을 상대로 일으킨 난]]은 고려의 핵심 전력 수만 명을 싸그리 갈아버린 대참사였고, 이를 계기로 금나라가 두려워했던 고려의 오군은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 남은 얼마 안 되는 군사력은 무신정권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삼별초]]가 증편되어 메꾸었지만, 이 또한 40년간의 [[여몽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후로도 백년간 이어진 [[원나라]]의 간섭 아래 고려의 국방 자주권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도성만 겨우 방비할 정도의 궁궐 호위대, 그리고 일종의 내무군이라 할 수 있는 [[의금부|순군]] 정도만이 당시 고려 조정이 보유할 수 있던 병력의 전부였다. 그리고 14세기 말, 고려는 이런 답도 없는 상태로 팍스 몽골리카가 무너지면서 동아시아 전체가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드는 끔찍한 안보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가 침공하고]] 반란군에 만주의 원나라 군벌, [[홍건적]], [[여진족]]까지 사방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선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러자 보유한 군대가 사실상 아무것도 없던 고려 조정은, 각 지역들에 원수인장(元帥印章)을 받은 원수들을 파견, 또는 임명하여 징발권과 군령권을 맡김으로써 적들을 상대하고자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종의 계급 인플레이션이 발생, '''[[도원수]](都元帥)''', '''[[상원수]](上元帥)''', '''[[부원수]](副元帥)'''가 도마다 한 명씩 배정되며 원수직은 상설화되었고, 그 성격도 경군의 총사령관에서 지역을 방위하는 사령관이자 [[군벌]]로 바뀐다. 그리고 총사령관으로써의 의미가 퇴색된 기존의 원수직 대신, 최상급 사령관 직위는 중국 [[송나라]]의 예를 참고해 '''도통사(都統使)'''로 명칭이 변경된다. 물론 송나라의 도통사는 고려에 대입하자면 도원수에 해당하므로 그대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각 도의 세 원수들은 맡은 역할이 조금씩 달랐다. '''도원수'''는 중앙에서 자신의 도의 시위패를 관할했다. '''상원수'''는 중앙에서 직무를 보다가 유사시 관할지로 돌아가 도의 방어를 맡았으며, '''부원수'''는 재상직의 일종이자 군정, 민사 행정가라 볼 수 있는 '''도순문사(都巡問使)'''를 겸하며 지역에 상주하여 외적이 쳐들어오면 직접 병력을 지휘하는 야전 지휘관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들만으로 자신의 관할지에 침입한 외적을 방어하기 힘들 경우 타 도의 원수들이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지원을 위해 그 지역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외적이 연해지역을 침공할 경우, 해군을 통솔하며 해안을 방위하는 '''해도원수(海道元帥)'''가 임명되기도 했다. 물론 원칙은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도원수-해당 지역 군대의 no.1 부원수-해당 지역 군대의 no.2 조전원수-해당 지역 군대의 주요 간부 이렇게 서열이 나뉘어진다.[* 중앙의 문관들이 무관들인 도원수나 부원수를 보좌하기 위해서 조전원수 직책을 받고 내려가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 도원수로 두기엔 모자르나 부원수로 두기엔 넘치는 사람들을 위한 직위인 '''원수'''가 추가되었다. 원수들에게는 각자 자신의 사령부라 할 수 있는 [[원수부]]를 열 권한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원수인장이 보장하는 각 도의 징발권과 통솔권으로 임지에서 익군과 시위패 병사들을 조직하거나 동원했고, [[참모부]]라 할 수 있는 진무소에 자기 가문 사람 또는 문객을[* 사전적으론 어떤 가문에 손님으로 들어와 게스트로 지내는 사람을 뜻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얹혀 사는 집 주인의 세력을 뒷받침하는 가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꽂아넣었다. 이로 인해 고려 말의 고려군은 사실상 각 지방 유력자들의 [[사병]]들이 모인 조직으로 변화했다. 고려 말기 심각했던 국가적 혼란으로 인해, 고려군의 원수들은 자기가 지휘할 병력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제대로 나왔다면 원수인장을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고려 후기의 원수들이 직접 지휘하던 병력은, 고려 전/중기 원수들이 지휘하던 수만명 단위에서, 자신들의 [[가별초]]들로 구성된 수백~20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원수들은 이 직속병력에 여기에 필요하면 해당 지역에 있는 백성들로 구성된 익군들을 임시로 동원해서 임무를 수행했다. 반면 도통사들은 이들 원수들을 통솔하며 수만 명 단위의 병력을 지휘했다. 결국 이러한 후기 고려군의 체제에서 여말선초 '[[신진 사대부]]'와 한 축을 이루는 '[[군벌|신진 무장세력]]'이 형성된다. 이 때문에 어떻게 보면 고려군은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군|당나라의 군대]]가 보여주었던 군제의 변화, 그리고 [[절도사]]/원수들로 대표되는 군벌들의 발호에서 비롯된 몰락이라는 전철을 비슷하게 따라갔던 셈이다. 이 시기 원수들이 넘쳐나던 고려군의 모습은 [[제2차 요동정벌]] 당시 편성된 [[공요군]]의 편제에서 잘 볼 수 있다. 자그마치 '''27명'''이나 되는 원수들이 좌/우군도통사에 분속되어 있다. ||<-5>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崔瑩)''' || ||<-5><#cccccc,#252525>||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조민수(고려)|조민수]](曹敏修)''' ||<|12><#cccccc,#252525>||'''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이성계]](李成桂)''' ||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심덕부]](沈德符)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정지]](鄭地) || ||부원수(副元帥)||[[이무]](李茂) ||상원수(上元帥)||지용기(池湧奇) || ||양광도도원수(楊廣道都元帥)||왕안덕(王安德) ||부원수(副元帥)||황보림(皇甫琳) || ||부원수(副元帥)||[[이승원]](李承源) ||동북면부원수(東北面副元帥)||[[이빈]](李彬) ||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박위]](朴葳) ||강원도부원수(江原道副元帥)||구성로(具成老) || ||전라도부원수(全羅道副元帥)||최운해(崔雲海) ||조전원수(助戰元帥)||윤호(尹虎) || ||계림원수(鷄林元帥)||경의(慶儀)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이원계]](李元桂) || ||안동원수(安東元帥)||[[최단(고려)|최단]](崔鄲) ||<-2>[[배극렴]](裴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 || ||조전원수(助戰元帥)||최공철(崔公哲) ||<-2>[[이지란|이두란]](李豆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 ||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조희고(趙希古) ||<-2>[[경보]](慶補)·이을진(李乙珍)·김천장(金天莊) || ||<-2>[[안경]](安慶)·[[왕빈]](王賓) ||<-2><#e7e7e7,#585858>|| ||<-5> '''총 병력 50,473명 군마 21,682필''' || 다만 왜구와 홍건적, 몽골 등의 외적들이 사방에서 침공해오고 있던 터라, 원수들의 독자행동은 정부에 대놓고 반기를 들 정도로 활발하진 않았다. 당연한 것인데 그 원수들이 각 도나 유력지방에서 재물과 사람을 모아 군대를 만들 수 있던 것은 바로 고려 중앙정부가 원수인장 수여를 통해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으면 제 아무리 원수라 해도 자기가 사는 동네, 크게 쳐줘도 자기가 사는 소재군현 이외에는 재물과 사람을 긁어모을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고려정부는 인사권과 중앙 조정에서 파견하는 감찰로 군벌이라 할 수 있는 원수들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 비교적 자유로왔던 원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조상 대부터 함경도 함흥 일대를 중심으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여 가장 강력한 [[가별초]]를 육성해놓았던 동북면원수 '''[[이성계]]'''다. 이성계 가문의 영지는 고려에게서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란 이름으로 빼앗았던 지역에서 시작했고, 따라서 그 성장의 뒷배경에는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가 있었다. 그리고 원나라의 몰락기에 이성계 집안이 쌍성총관부를 통째로 들고 고려에 자발적으로 귀순해오면서, 고려 정부는 반원 정책의 가장 큰 성과를 들고 온 이성계 가문이 가진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했다. 거기다 이성계에게는 무주공산으로 변한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기존 원나라 영토에 살던 이민족 부족들에 대한 영향력도 건재했다. 따라서 다른 원수들과 달리, 이성계의 거대한 동북면 영지는 고려 정부의 영향력이 사실상 '''없었다'''. 이성계는 여타 원수들과 달리 고려시대 주요 권신들과도 비교해도 최씨정권정도를 제외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씨정권조차도 이런 수준의 기반을 가지지 못했고 그나마 진강, 진양, 진평 등 가라치기로 작위명을 갈아치우며 영향력을 억지로 이은 진주지역에서나 어느정도 비슷한 것을 해볼 만한 정도였다. 그리고 쌍성총관부 총관이던 [[조소생]]의 한양 조씨세력이 숙청되면서, 그의 영지인 동북면에서 그에 대적할 인물은 사라졌다. 그리고 후에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가 가장 큰 경쟁자인 팔도도통사 [[최영]]과 [[공요군]] 좌도도통사 [[조민수(고려)|조민수]]를 숙청하고 그나마 반이성계 세력의 실전무력을 가진 마지막 거물급 군벌인 [[변안열]]마저 숙청해버리자, 이성계에게 반할만한 세력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장차 위협이 될 수 있는 원수들의 인장을 회수하고 오군을 삼군으로 개편한 후, 최고사령부 격의 기관인 [[삼군부|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여 자신이 그 장관이자 고려군 최고사령관이라 볼 수 있는 '''도총제사(都摠制使)'''에 올랐다. 이로써 상설직으로써의 원수직제는 폐지되어 여말선초의 도절제사, 그리고 조선왕조의 [[절도사]]제로 바뀌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