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소설 (문단 편집) === 조선 유학자들의 비판과 수용 === [[예수회]]의 중국 포교로 유입된 서적이 [[17세기]]에 [[조선]]으로 들어옴에 따라 4원소설 역시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서적들은 중세 자연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조선에 들어온 4원소설은 기독교 교리와 결합된 형태였다. 한편 당시 조선의 자연관이었던 오행설에 대한 불합리성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박지원(실학자)|박지원]]과 [[홍대용]]은 [[오행]]설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지만, 이들의 시도는 4원소설의 본격적인 수용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삼행이나 사행과 같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이 4원소설을 받아들이는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조선 유학자들 중 몇몇이 4원소설을 받아들이게 된 기반이 될 수 있었다. [[18세기]] 말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천주교 교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던 4원소설을 주장하는 것은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이단시 취급되었다. 즉,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4원소설은 자연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교의 가치를 부정하고 천주교를 신봉하는 하나의 종교적 신념으로 여겨졌다. [[홍정하]]는 그러한 관점에서 4원소설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지식인 사회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만물진원증의(萬物眞原證疑)[* 만물진원증의가 실린 증의(證疑)는 대동정로(大東正路)의 제5권과 제6권에 편집되어있다. 참고로 허칙의 대동정로는 허칙이 1903년에 여러 학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편집한 것이다.]를 통해 4원소설을 비판하였다. 그가 비판 대상으로 삼은 만물진원(萬物眞原)은 대중용 천주교 교리서로 저술되었기에, 본래의 4원소설이 갖고 있는 논리성이 좀 더 떨어지고 종교적 색채가 강했던 서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