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성왕 (문단 편집) == [[묘호]]와 [[시호]] == * 묘호: 열조(烈祖) * 시호: 원성대왕(元聖大王) [[성한왕|태조 성한왕]], [[태종 무열왕]]과 함께 신라 당대의 기록에서 [[묘호]]가 확인되는 세 명의 임금 중 하나다. 신라 이후의 기록에서 묘호가 확인되는 것은 [[추존]]된 [[세조]](世祖) [[김알지]][[http://sillok.history.go.kr/id/kua_13303026_005|(링크)]] 등 몇 명이 더 있으나, 신라 당시에 김알지를 세조로 추존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신라 멸망 후 수백년이 지나 작성된 《삼국사기》에서는 이 중 무열왕만이 태종이란 묘호가 기록되었다. 원성왕에게 '열조'의 묘호를 올린 것을 알 수 있는 사료는 신라 당대의 기록인, [[최치원]]이 비문을 작성한 초월산 <숭복사(崇福寺)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4&itemId=gskh&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gskh_005_0010_0050_0020|링크]].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설된 왕실 원찰(原刹)이다. 참고로 고려나 조선은 원칙적으로 모든 군주에게 묘호를 올렸다. 고려의 경우는 [[원나라]]의 [[원 간섭기|내정 간섭을 거치면서]] 어쩔 수 없이 [[제후]]의 법도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서 묘호를 폐지했고, 조선에서는 폐위된 임금은 묘호를 올리지 않았다. 반면 신라에선 일부 군주에만 묘호를 올렸는데 그 이유는 해당 시대의 묘호 관행이 달랐기 때문이다. 묘호 제도는 본래 중국에서 건너온 것인데, 원래 중국에서도 모든 군주가 아니라 일부 중요한 업적을 남긴 군주에만 묘호를 올렸다. [[후한]] [[환제(후한)|환제]]의 경우 앞의 관행 때문에 묘호가 강제 취소당했다. 예를 들어 [[한나라]]의 경우도 몇몇 황제는 태조, 세조 등의 묘호가 있었지만 《[[삼국지]]》로 유명한 [[영제(후한)|영제]]나 [[헌제]] 같이 업적이 없었던 황제는 묘호가 없었다. [[한나라#s-4|해당 문서 참조.]] 《[[삼국지]]》로 한국에도 유명한 조위•촉한•동오나 사마씨의 진나라([[서진]], [[동진]])도 마찬가지로 일부 중요한 군주만 묘호를 올렸다. [[중국]]에서 모든 군주에 묘호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였고, 이를 한반도에서는 [[고려]]부터 처음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에서 모든 왕이 아닌 일부 중요한 왕에만 묘호를 붙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