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원나라 (문단 편집) == 사회 ==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정복활동 초기에 몽골 제국은 한족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아 논밭을 목장으로 바꿀 계획이었다. 그러자 [[야율초재]]의 "근데 얘들 죽이면 [[세금]]은 어디서 걷어요?" 이 한마디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학자들은 이 기록이 거짓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몽골족들도 세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도시 한두 개도 아니고 화북의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그런 계획을 했을 리가 없었다.[* 칭기즈 칸은 생전에 몽골족이 아닌 이민족이라도 자신을 따른다면 관대하게 받아주었다. 이는 단순히 창업군주로서의 비범함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에 국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에게 임관했을 때는 엄연히 송나라가 건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족을 모두 죽이고 비옥한 농토를 목초지로 바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알아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었고, 몽골족들은 그런 것을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목초지 발언은 몰라도, 일단 야율초재에게 거란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들을 모두 죽여주겠다고 한 말은 진심으로 보인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몽골 카스트.png|width=100%]]}}}|| 원나라의 통치는 '''영주분봉제'''로 기본적으로 봉건적인 신분제 사회였다. 원나라는 '''몽골인 → 색목인 → 한인 → 남인''' 이렇게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들은 3~4 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생활했다.[* 여진인이나 고려인은 한인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원나라에서는 호적상 이들의 신분층을 계관호(係官戶)와 투하호(投下戶)로 나누었는데, 투하호는 귀족에게 사적으로 배속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이었으며 노예층은 '구구'라고 따로 불리었다. 원나라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외에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원나라의 법률은 "'노예[* 구구(驅口)라고 불렀다.]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했는데, 주인은 임의로 노예를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다. 또한 원나라에는 인시(人市)라는 이름의 노예시장이 존재했는데, 여기서 노예들을 사고 팔 수 있었다. 원나라의 중급 관리는 100명 이상의 구구(노예)를 보유했고, 대사장(大使長, 노예주)의 구구는 왕왕 수천 수만명이었다. [[쿠빌라이 칸]]의 총신인 아하마의 경우, 7,000여 명의 구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 20가구를 1갑(甲)으로 편성했으며, 각 갑마다 한 명의 갑주(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으로,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 이 갑주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최우선적으로 즉결 처분되었다.] *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 여자 노예가 결혼할 경우 영주가 먼저 여자와 동침하는 권리.]은 몽골 병사의 몫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중국 민속학의 개척자인 주작인 같은 학자는 절강성의 규방 풍습을 논하면서 초야권과 연결짓기도 했다. *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도록 했다. 열더라도 대부분 어용 집회였다. *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중국 요리]]들 중에서,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칼로 조금씩 잘라가면서 나온 조각을 삶아서 면을 만드는 방식인 [[도삭면]]이 이때 처음 나왔다. 요리용이라도 함부로 칼을 소지했다가는 [[참수형|목이 달아났으므로]], 굴러다니는 쇳조각으로 밀가루 반죽을 잘라서 면을 만들어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 노예는 사유물로 그 재산은 주인 마음대로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었다. * 전부는 아니지만 노예인 한족에 한해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 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주원장|주중팔]]'''이었다.[* '중팔'(重八)은 8이 중복된다는 뜻으로, 즉 88을 의미했다. 주원장의 출생 당시 아버지가 46세, 어머니가 42세였으며 이를 합하면 88이기 때문에 중팔이라는 아명을 갖게 되었다.] * 과거제도에 있어서도 계급별로 할당량을 정해두어 최하 계급인 남인의 경우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현실로 인해 원나라 시대의 남인들 중에서 문인들은 과거시험을 공부하지 않고, 대신 생계를 위해 희곡 대본을 썼다. 그래서 원나라 시대에 '''잡곡'''이라 불리는 희곡들이 줄을 지어 나왔다.]. * 《몽올아사기》(蒙兀兒史記)에서도 4등인제가 언급되고, 서방 수도사 오도릭의 글에도 한족을 차별하는 정책적인 도구인 보갑제가 등장한다. 또한 직종에 따라서 10등급으로 나누었다. 관리, 아전, 도사, 승려, 의사, 기술자, 목공, 창녀, 유생, 거지가 그 순서다.[* 이것은 정사초의 《대의략서》란 글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정사초가 반몽감정을 아주 강하게 가졌던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자라 《대의략서》란 글 자체에 차별주의적인 논조가 스며들어있어 단지 제색호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 사회적 신분의 서열로 탈바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출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김호동).] 또 원대 중기부터 과거가 시행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유학적 지식보다 실무 행정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실무 중시 경향은 원나라뿐만 아니라 금나라와 신법 이후의 송나라에서도 그랬다.[* 잡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진여록》(燼餘錄)에 의하면, '원나라가 개국한 뒤에 20가구를 ‘갑’으로 개편하고, 젊고 튼튼한 사람을 ‘갑주’로 하였으며 의복, 음식을 하고자 하는 대로 다 하였다. 동자나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칠경록》에 의하면 '몽골인과 색목인의 포로 중 남자는 '노'라 하였고 여자는 '비'라 하였다. 이들을 통칭하여 구구라 하였다.' 왕서노의 《중국창기사》에 의하면 원나라때 거의 모든 한인이 노예였고 외족(몽골/색목인 등)에 의한 한족 여성 수탈은 전 중국에 두루 퍼졌다고 한다. 홍익희 세종대 교수의 책에서 초야권에 대한 글이 나온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krmvDQAAQBAJ&pg=PT200&lpg=PT200&dq=%EC%9B%90%EB%82%98%EB%9D%BC+%EB%AA%BD%EA%B3%A8%EC%A1%B1+%EC%9D%B8%EA%B5%AC&source=bl&ots=Ivkahmitq4&sig=ACfU3U0me2DQB3nJKeuOosRzaSK46s_RRw&hl=ko&sa=X&ved=2ahUKEwiOsvC2vYHpAhWaad4KHUwhDtkQ6AEwC3oECAsQAQ#v=onepage&q=%EC%9B%90%EB%82%98%EB%9D%BC%20%EB%AA%BD%EA%B3%A8%EC%A1%B1%20%EC%9D%B8%EA%B5%AC&f=false|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하지만 홍익희 교수는 스페인어 전공자로 역사학자가 아니고 그이 주장은 신뢰성이 없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초야권이라는 법령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원나라 통치 기간 동안 대칸들은 오히려 순결을 강력하게 장려했다고 한다. 당시 중원 지역에 온 몽골인은 겨우 30만 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주로 군인인지라 편제 유지에 집중해야만 했으며 나머지 지역으로 흩어진 몽골인들의 숫자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 [[https://kknews.cc/history/eg5ynj4.html|#1]] [[https://m.sohu.com/n/475551531/|#2]] 강남 지역에서는 남송대부터 터를 잡은 일부 지주층들이 원대에 그 기득권을 인정받아 자치를 행했다는 설도 있다. 이들은 관할 구역 내에서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면서 몽골 정부에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민을 농업 생산이나 산업 일꾼으로 부리는 한편 향촌 사회를 유지하며 과거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원말 한족 군웅으로 궐기하여 원나라 붕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의 영어권 권위자인 미카엘 딜런 교수에 의하면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한족들이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몽골 문화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수백만 명의 몽골인 남성들과 색목인 남성들을(Israeli, Raphael (2002). Islam in China.) 한족 여성과 강제결혼을 시켰을 정도라고 한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BwuSpFiOFfYC&pg=PA31&redir_esc=y&hl=ko#v=onepage&q=Han%20wives&f=false|#]] 반대로 몽골인 여성들과 색목인 여성들 또한 한족 남성과 강제결혼을 당했다. 서울대학교 김호동 교수의 논문 《팍스 몽골리카와 중국》에 의하면 일본학자 후나다 요시유키(舩田善之)가 '색목인'이라는 명칭을 연구하면서 색목인이라는 명칭은 한족을 차별하기 위한 구분이 아닌 구별을 하기 위함이라 하면서 나아가 4등인제에 오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호동 교수는 이 설에 호의를 보이면서도 '이러한 견해는 이제까지 색목인에 대한 이해가 몽골 지배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이라는 구분이 처음부터 민족 차별을 위해서 도입된 분류는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한인이나 남인에 비해 색목인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한족이 차별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원말, 주원장을 비롯한 여러 실력자들이 강남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원나라를 칠 여력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유복형이나 조양필 등 한족 간부들도 원나라 황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곤 했다. 특히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다. 또한 당시 원나라의 인구비를 살펴보면 몽골인 100만 명, 색목인 수백만 명, 한인 1,000만 명, 남인 6,000만 명가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몽골군이 강하다고는 해도 몽골인과 색목인으로 6,000만 명을 지배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 제3계급인 한인을 활용했다. 고려인은 3계급에서 우대받은 편이라(처음부터 우대받은 건 아니었고, 고려가 부마국이 되고난 뒤 세월이 지날수록 지위가 나아졌다.) 고려인만을 대상으로 뽑는 과거제도(괴과-魁科)를 시행하기도 했고, 여기서 장원급제한 전원발[* 나중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로 귀국할 때 당시 황제인 [[원혜종]]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고려의 공물을 줄여달라고 답했고, 황제가 이를 들어주어 고려의 공물 상납이 크게 줄어들었다.] 같은 경우는 병부상서까지 오르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 이곡, 최해 같은 이들이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는 등 고려인 관리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사서를 보면 몽골인들이 군사 부문 외엔 행정에서 별로 한 것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점령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상당히 위태로웠다. 비유하면 군대는 있으나 경찰이 없어서 몽골인이 적대적인 점령지에 소수로 여행을 다니기에는 매우 위험했다. 조공을 바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대놓고 몽골인을 '타타르'라고 부르며 경멸한 러시아 같은 지역들은 몽골인을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안전책도 없이 갔다가는 사망 확정이었다. 몽골 제국을 고평가하는 학자들은 "처녀가 금화 자루를 갖고 홀로 카라코룸에서 사라이까지 여행해도 아무 일이 없었다.'라는 기록만 갖고 몽골의 치안이 좋았다고 주장하나, 이 기록은 몽골 제국 측에서 기록한 것이고 [[역참]]들이 지키고 있는 대로에만 해당한 것이다. 유목민이 선조인 나라들을 봐도 특이한 케이스다. 물론 농경국가적 성격이 있는 경우다. 몽골의 경우도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만주족과 몽골인을 비교하면 몽골인 쪽이 밀리는데 사실 묶어서 분류하기에 원나라는 너무 특이한 나라다. 명목상으로는 몽골인이 중요한 행정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몽골 제국에서 여러모로 우대를 받던 색목인들의 기록에서는 잉여다. 물론 페르시아인처럼 몽골인들에게 털린 사람들도 있어서 폄하로 볼 수도 있으나 거란족인 야율초재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반론을 하려고 해도 몽골 출신의 학자나 심지어는 글을 제대로 알던 사람도 극히 적기 때문에 반론도 거의 불가능하다. 학문적 스펙이 뛰어나지 않았던 사람들도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일단 학문을 알아서 학문적 능력을 기른 사람들이나 그렇고 몽골인들은 학문 자체를 모르니 답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수학적 업적을 남기려면 일단 학벌이 좋지는 않아도 수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몽골인은 자기가 직접 학문하는 것보다 다른 민족들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수를 맞을 위험이 항상 있었다. 이런 문제점 때문이라도 메이저 민족들 중에서 유목민 출신 선조들을 가진 경우를 살피면 유목민들도 본인들이 어느 정도 학문에 관심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는데,[* 당장 중국의 후대 유목민계 왕조인 [[청나라]]도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적극적으로 학문을 연구했다. 인도의 [[무굴 제국]]과 유럽 및 중동의 [[오스만 제국]]도 마찬가지였으며, 원나라가 특이한 케이스였다.] 특이하게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직접 공부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운영하던 국가였다. 그러나 각 지역에 동화된 이후에는 지역문화에 능통해진 몽골인들도 많으니 일반화는 다소 위험하다. 한편 유복형은 고려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중세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프린스턴대의 Frederick W. Mote 교수에 의하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SQWW7QgUH4gC&pg=PA492&redir_esc=y#v=onepage&q&f=true|#]]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