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운하 (문단 편집) === [[고대]] ~ [[중세]] === 바닷길은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육상 운송에 비해 우위에 있어왔다. 일단 현재의 한국같이 도로망 정비가 잘 되어있으며, 육상 운송이 경쟁력 있을 정도로 적절한 크기의 나라는 현대에도 많지 않다. [[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2182981721|조선은 왜 수레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참조. '그나마' 육상 운송에서 좋은 효율을 보인 사례가 바로 '[[사막]]의 [[배]]'라고 불렸던 [[낙타|단봉낙타]][*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사막에 쓰이던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바로 그 낙타. 쌍봉낙타는 주로 추운 지방에서 쓰인다.]인데, 한 마리가 500kg 정도의 짐을 운반할 수 있다. 반면 [[콜롬버스]]가 타고 [[신세계]]를 탐험했던 [[산타 마리아]] 호의 배수량은 80톤. 짐을 얼마나 싣는지는 항행목적에 따라서 다르지만 10%만 짐을 싣는다고 해도 8000kg이 넘는다. 여기서 벌써 10배가 넘어가건만, 이동 내내 [[가축]]의 식료도 감안해야하는 육상운송과 달리, 선박운송은 [[선원]]의 [[식량]]만 감안하면 되기에 유지비도 저렴, 거기에다 [[속도]]조차 선박이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니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다. [[현대]]에는 [[철도]]의 등장과 함께 육상 운송 기술의 발달로 운송 속도에서는 육상 운송이 해상 운송을 앞질렀으나, 아직도 장거리 운송에서는 해상 운송이 경제성 면에서 육상 운송을 압도, 국제 교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항공]] 운송 역시 속도는 철도보다 더욱 빠르지만 수송량이 너무 적고 연비가 나빠 가성비 측면에서는 여전히 해상 운송이 훨씬 우위다. 대한민국의 수출입은 물동량 기준으로 해상 운송이 99%, 항공 운송이 1%에 불과하다.[* 단, 항공 운송하는 물품들은 반도체, 의약품 등 무게나 부피 대비 고부가가치인 경우가 많으므로 톤수가 아닌 액수를 기준으로 하면 항공 운송의 비중이 상당히 커지긴 한다. 이를 자유입지형 공업이라고 한다.] [[북한]] 때문에 [[지정학]]적 [[섬나라]]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총 물동량 기준으로 따져도 대한민국이든 전세계든 철도의 비중은 생각보단 매우 낮다. 따라서 [[지협]]을 보고 일반인들은 "육로가 이어져있다"고 생각하지만, [[상인]]이나 운수업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해로가 막혀있다"는 쪽이 현실적인 인식이었던 셈. 그러다보니 폭이 좁은 [[육지]]로 분리되어 있는 두 수계(水系)가 있으면 '''"저 땅을 [[박살]]내서 물길을 연결하기만 하면 운송비용을 아껴서 떼돈을 벌 수 있겠네?"'''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운하가 건설되어 있는 [[수에즈 운하]], [[파나마 운하]], [[킬 운하]], [[코린토스 운하]] 등등은 모두 옛날부터 운하 건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었다. 특히 수에즈 운하는 아예 머나먼 [[고대 이집트]] 때부터 건설 계획이 있었다. [[조운(동음이의어)|조운]]을 그나마 풍부한 수로에 의지하던 [[한반도]] 국가들 또한 [[서해]]에 항해 난코스가 많아 이를 피하기 위한 운하를 파려고 한 적이 있다. 일단 조수간만의 차이가 너무 심하고, 지형도 정말 복잡다난하다. 여기에는 항해 기술이나 선박 건조술이 연안 항해에 머물렀던 탓도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서해안 근해는 [[난파선]]의 [[천국]]이고, 우리나라 해양 [[고고학]]의 성지다. 과거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지역들도 대부분 서해 ~ [[남해]]의 복잡한 지형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조류들을 잘 이해하여 함선들을 지형과 조류에 맞게 정확하게 통제했었기에 가능했던 것. 반대로 그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가 다 말아먹은 [[원균]]의 [[칠천량 해전]] 또한 이 특성을 반대로 왜군에게 역이용 당해서 깨진 [[전투]]이기도 했다.] [[태안군|태안반도]]에는 [[조선 태종]] 때는 실제 공사까지도 들어갔었으나 운하가 개통되진 못하였다. 그러다 [[인조]] 때 운하성공사례가 나오니 바로 [[안면도]]. 안면도는 본래는 안면'''[[곶]]'''이었지만, [[김육]]이 이 곳에 운하를 파면서 자연스럽게 안면'''도'''가 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 연륙교(連陸橋)인 안면교(安眠橋)가 건설되어 몇백 년 만에 다시 육지와 연결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건설]] 기술에 한계가 있다보니 필요성은 필요성에 그칠 뿐, 실제로 운하가 완성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드물다'와 '없다'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중국]]은 막대한 인력과 물자, 기술,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터무니 없는 스케일의 [[대운하]]를 2번이나 파냈고, 심지어 [[북송|송대]]에는 현대에도 써먹는 갑문을 발명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거대한 [[중국 대륙]]의 거대한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서라도 곡창지대인 [[강남(중국)|강남]]의 식량과 물자를 [[강북]]으로 실어나르는 물류통로로써의 내륙 운하 건설이 중국 [[왕조]]의 중대과제였던 것. 단 건설을 시작한 왕조는 건설비용을 문자 그대로 때려박다보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국력]]을 까먹어 망하고, 운하의 이득은 후대 왕조가 누렸다. 그리고 애초에 자연적으로 조성되어있던 [[환경]]을 [[인간]]의 편의성 하나를 위해 임의로 마개조한 산물이니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원상복구되는 문제가 있어서 꾸준히 [[관리]]를 해주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운하를 유지보수하는 비용이 운하가 아예 없을 때 들어가는 추가 운송 비용보다 싸게 먹히니까 계속 관리는 되고 있지만. 인간이 [[자연]]을 일시적으로 뒤집어엎을 수는 있어도 완전하게 정복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