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페이푸 (문단 편집) === 몰락과 말년 === 1926년 7월 1일 국민당의 [[장제스]]가 광저우에서 북벌을 선포, 7월 9일에 북벌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10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의 1차 북벌]]이었다. 이들은 숫자는 적어도 혁명정신과 [[소련]] 교관들의 훈련으로 인해 전투력이 군벌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엄정한 규율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심을 얻었다. 펑위샹을 밀어붙이던 쑨촨팡과 우페이푸는 결국 장제스의 역습에 잇달아 패했고 자신의 중심지인 우한을 장제스에게 내주고 맥없이 패퇴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한을 사수할 것이라고 외신기자들에게 외쳤지만 그의 부하들은 앞다퉈 탈영하고 장제스의 매수에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우한이 함락되고 우페이푸는 하남성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쭤린이 뒤통수를 치고 하남성으로 진군하여 8월에 하남성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에 차오쿤을 비롯하여 직예파의 요인들이 줄줄이 봉천군벌에게 항복함에 따라 결국 그는 완전히 낭인 신세로 전락하여 쓰촨 군벌 [[양썬]]에게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라며 몸을 의탁했고 4년을 쓰촨에서 지내게 된다. 이 시기 일본 제1함대 총사령관 아라키 지로 소장과 특무기관장 후지 슈 대좌 등이 우페이푸에게 군비 100만원, 소총 10만자루, 야포 500문, 기관총 2000정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이전에는 나 역시 10만 자루가 넘는 총과 100만원에 달하는 거금이 있었소.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승패는 돈이나 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오. 내가 외국 돈이나 외국의 원조를 받고자 했다면 왜 오늘까지 기다렸겠소? 중국의 일은 중국인 자신이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하니 귀국의 성의를 받아들일 수 없소."라고 거절했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생하자 그는 재기를 노리고 [[옌시산]]에게 합류했으나 장제스가 제때에 쓰촨 군벌들을 매수함으로 처참하게 실패했고 간쑤에서도 실패했다. 1931년, 반장전쟁을 진압하고 중국의 지배자 자리를 공고히 한 [[장제스]]는 옛 적인 우페이푸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가 쓰촨 밖으로 나오는 것을 허용했고 그는 장쉐량의 초청을 받아 베이핑으로 이주하여 그와 숙질 관계를 맺고 장쉐량에게 사부 대접을 받게 된다. 그는 이제 완전히 실권한 상태였으므로 장제스의 눈에도 그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베이핑에서 장쉐량이 주는 용돈을 받으며 살았고 공산당을 토벌하던 장제스와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그는 사실상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였는데 일본은 1935년부터 [[화북분리공작]]이란 것을 함으로 만주에 이어 화북을 식민지화하려 했고 우페이푸를 구슬리며 그를 꼭두각시로 내세우려 했지만 젊어서부터 반일 성향이 강했던 우페이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우페이푸가 거주하던 베이핑도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페이푸는 피난을 거부하고 자신의 집에 [[관우]]와 [[악비]]의 초상화를 걸고 일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관동군은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를 통해 우페이푸를 포섭하여 괴뢰정부의 수장으로 삼으려고 [[한간]]들을 보내 그를 유혹했으나 우페이푸는 한간들에게 어찌 일본인의 주구가 되려 하냐며 크게 욕하며 그들과 절교를 선언했다. 일본은 협조한다면 산포 200문, 소총 10만정, 기관총 2천정, 100만위안의 군자금을 제공하겠다고 러브콜을 보냈고 일본에 붙은 [[왕징웨이]]도 그를 회유했으나 우페이푸는 단호했다. 그러던 중 1939년 12월 1일 양고기와 만두를 먹던 우페이푸의 치통이 갑자기 심해져 고열에 시달렸고 치료를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치과병원을 찾았는데 12월 4일 거기서 급사하고 만다. 우페이푸의 사인에 대해 [[일본]]의 암살설이 떠돌고 있지만, 주류 역사학계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의 사인이 [[치주염]]이 [[패혈증]]으로 번진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을 만큼, 옛날에는 치과 질환도 사람잡기는 딱 좋은 질병이었다. 물론 이때는 위생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오늘날에 비하면 아직 위생 수준이 심하게 낮았기 때문에, 치과 치료 중이나 혹은 그 이전에 이미 치통이 [[패혈증]]으로 번졌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는 지적이 있다. 사실 아예 당시 [[일본]] 군부와 정계가 바라던대로 [[장제스]]를 포섭한다면 모를까, 이미 세력 다 날아간 우페이푸 정도 되는 인물을 포섭하지 못한다고 해서 큰 손실도 아니었고, 거꾸로 말해서 굳이 죽여 일본이 얻을 것이 딱히 없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