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페이푸 (문단 편집) === 1차 직봉전쟁 === 돤치루이가 물러난 이후 천하는 직계와 봉계가 나누어 가졌지만 이 시기가 다 그렇듯이 당연히 둘은 서로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장쭤린의 야심은 끝이 없었고 정통 엘리트 출신인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마적단 출신의 장쭤린을 하찮게 보았으며 그들의 약탈 행위에 그들을 더욱 경멸했다. 봉계의 수장 장쭤린은 우페이푸를 차오쿤의 졸개 정도로 여겨 신경쓰지 않았고 직환전쟁이 끝난 후 벌어진 회의에서 장쭤린이 우페이푸에게 일개 사단장이 어디서 입을 여느냐고 호통을 친 적도 있었지만 우페이푸가 즈리, 허난, 후베이, 후난을 점령하고 양호순열사가 되어 위세를 부리자 뒤늦게 그가 직계의 실세임을 깨닫고 크게 경계하게 되었다. 우페이푸 또한 직환전쟁 후 회의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장쭤린을 싫어했고 차오쿤이 또 다시 장쭤린과 싸울 수도 없지 않느냐고 달랬음에도 뤄양에서 병사들을 조련하며 장쭤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이에 자극받은 장쭤린은 러허를 점령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고 다시 천하를 두고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직계와 대립했다. 반면 우페이푸는 영미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늘렸고 산시 성과 허난, 후베이로 세력을 확장했다. 장쭤린은 반직예파 동맹을 결성하여 직예파를 섬멸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런 수면 밑의 충돌 외에서도 수면 위에서도 갈등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는데 당시 열악한 중국의 재정 문제 때문에 봉천과 직예가 강력히 충돌한 것이다. 거기다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외몽골을 점령한 일 등도 겹쳤지만 북양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무능한 정부 사이에서 양자는 정부가 편향적이라고 비판을 해댔다. 1921년 12월 14일 장쭤린은 북양정부의 [[진윈펑]] 내각을 [[량스이]] 내각으로 갈아치웠고 환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돤치루이 계 인물들을 대거 사면해주었는데 이 때문에 직계는 배신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거기에 량스이가 위안스카이 시절 친일행위로 대중의 분노를 산 바가 있는 각료들을 등용하자 이에 우페이푸는 량스이를 [[이완용]] 같은 자라고 맹렬하게 비난, 량스이 내각 토벌을 통전하여 량스이 내각을 한달만에 붕괴시켰다. 봉계가 수립한 량스이 내각이 붕괴되자 결국 [[봉천군벌]]과 [[직계군벌]]은 1922년 4월 28일에 충돌하는 데 이것이 바로 [[1차 직봉전쟁]]이다.(봉직전쟁이라고도 한다.) 기량이 형편없던 봉천군벌은 [[장쉐량]]과 [[궈쑹링]]이 지휘하던 2개 부대만 제외하곤 모조리 참패를 면치 못했고 장쭤린은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실망을 금치 못하면서 만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페이푸는 산해관까지 장쭤린 군대를 밀어붙였으나 일본의 눈치를 봐서 더 이상 진군하진 않았다. 이로써 우페이푸가 중국 천하의 1인자로 등극한 것이다. 이때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던 쑨원 북벌을 외치며 우페이푸의 후방을 찔러보려 했으나 북벌이 비현실적인 몽상이라 여긴 [[천중밍]]이 우페이푸와 결탁하여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을 광저우에서 오히려 축출했다. 천중밍은 대가로 우페이푸에게 광둥 성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때 사천군벌 [[양썬]] 등도 우페이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담조전쟁]]을 지원한 대가로 [[자오헝티]]도 우페이푸에게 굴복하면서 우페이푸의 세력권은 전국 각지로 뻗어나갔으며 지위도 높아져 육군총장에 올랐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이후 총통 옹립 문제인 '최고문제'에 대해 중국을 통일시킨 후에 총통을 민의에 따라 추대해야 할 것이라면서 차오쿤과 조예의 천보파의 즉각적인 총통 옹립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고 [[왕충후이]] 내각을 지지하여 [[뤄원간 사건]] 때도 리위안훙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차오쿤이 반발하자 불간섭을 선언했다. 우페이푸는 교통계와 봉천군벌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의 합작을 매우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보이틴스키를 비롯한 소련인들이 우페이푸를 고평가함에 따라 베이징에 주재한 주중국전권대표 아돌프 요페가 우페이푸와 접촉했는데 우페이푸는 중동로와 외몽골 문제에 있어서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소련과 우페이푸의 합작은 결렬되었다. 1923년 우페이푸가 [[2.7 사건]]을 일으켜 노동운동을 강경히 탄압함에 따라 우페이푸와 철도 문제로 협력하고 있던 [[중국 공산당]]은 우페이푸를 맹비난하며 그와 단절하고 반우페이푸 운동을 전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