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인 (문단 편집) == 러시아인과의 차이 == 19세기부터 러시아 제국의 학계 연구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민족은 이미 러시아와 다른 민족이라고 지적돼 왔다. [[하르키우 대학교|하리코프 대학교]]의 교수였던 막시모비치(Mykhailo Maksymovych)가 학계의 선구자였다. >[[하르키우 대학교|하리코프 대학교]]의 교수였던 막시모비치(Mykhailo Maksymovych)의 노력으로 1820년대-1830년대의 문학, 민속 작품들은 훨씬 더 정교해졌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민요를 비교 분석한 다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민요를 비교 분석한 다음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별개의 민족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는 ‘소러시아인’이라는 단어 대신 ‘우크라이나인들’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었다. 그는 ‘소러시아 민요’(1827년) ‘우크라이나 민요’(1834년) ‘우크라이나 민요집’(1849년)을 발간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허승철 편역), 파주 : 문예림, 2015.pp.95-96]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코스토마로프의 연구에서도 다른 민족과 별개의 민족임이 지적돼 왔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코스토마로프는 1861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서 쓴 <두 러시아 민족>이라는 논문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민족성의 차이를 묘사했다. 그에 의하면 우크라이나인은 개인주의 경향이 강하고, 러시아인은 집단주의를 중요시한다. 우크라이나인은 최소한의 통제질서를 가진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 반면, 러시아인은 한 사상으로 통합된 확고한 집단적 체제를 선호한다. 그는 이어 말하기를 러시아적 요소는 거대하고 창조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전체주의적 정신, 통일적 의식, 실용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 러시아인들은 모든 고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행동에 나서기에 가장 좋은 시간과 환경을 선택한다.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러한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정신은 사회적 제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이끌거나, 모든 방향으로 민족적 노력을 분산시키는 소용돌이 같은 기도를 하게 한다. 두 민족의 이러한 특성에 대한 증거는 역사가 제공해 준다고 코스토마로프는 말하고 있다.[* 허승철, 『우크라이나 현대사 1914-2010 』,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2011. pp.47-48] 이에 관해 코스토마로프는 논문에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민족성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코스토마로프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민족성 비교 >(1861년 ‘기초(Osnova)’지에 실린 ‘두 개의 루스 민족’에서 발췌) > >남루스인(우크라이나인)들은 개인주의, 대루스인(러시아인)들은 집단주의가 특징적이다. 정치 부문에서 남루스인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정도만 통제하는 자유로운 사회체제를 스스로 만들어낼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루스인들은 단단한 기초 위에 하나의 정신으로 충만한 집단적 구조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남루스인들은 연방적 구조를 지향하는데 반해, 대루스인들은 전제제와 강력한 군주제를 지향한다. >대루스인들은 거대하고 창조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전체성과 통합적 의식, 실천적 이성의 지배가 특징이다. 대루스인들은 온갖 역경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으며 행동이 가장 필요하고 여건이 가장 유리한 시간을 고를 줄 안다. >남루스인들은 이러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들의 자유분방한 즉흥성은 사회적 체제를 파괴하거너 민족적 노력을 온갖 방향으로 분산시키는 소용돌이로 귀결되었다. 두 민족에 대한 이러한 증언은 역사에 의해 증명되었다. >남루스인들과 폴란드인들의 관계는 매우 다르다. 언어적으로 남루스인은 폴란드인보다는 대루스인에 가깝지만, 민족적 특성에 있어서는 폴란드인에 더 가깝다. >물론 폴란드인들과 남루스인들을 구별하는 큰 간극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폴란드인들과 남루스인들은 반대 방향으로 자라는 나뭇가지와 같다. 한 가지는 가지치기가 되어 ‘귀족’이라는 우아한 열매를 맺었고, 다른 가지는 농민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이것을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폴란드인들은 전제적인데 반해 남루스인들은 민주적 민족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가 두 민족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의 전제제는 매우 민주적이고, 남루스인의 민주제는 매우 전제적이다. 폴란드의 귀족은 계급의 범위 내에 머물려고 하는데 반해, 우크라이나에서 주민들은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고 많은 것을 획득하는 개인들을 자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뿌리를 둔 민중에 의해 다시 흡수된다.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투쟁은 다른 민족이 높게 가치를 두는 강력한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사회적 구조를 자주 약화시킨다.[* 『우크라이나의 역사』(허승철 편역) pp.98-99에서 재인용] 위의 연구를 바탕으로 원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은 [[키이우 대공국]]을 뿌리로 하는 같은 민족이었으나 키이우 대공국이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하자 키이우 대공국의 중심부인 [[초르노젬]] 지대의 키이우 공국, 체르니히우 공국, 페레야슬라블 공국에 살던 루스인들은 몽골 제국의 손미치지 않은 서쪽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피난을 가고 이후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은 몽골 제국을 견제하려는 [[교황청]]의 도움을 얻어 [[루테니아 왕국]]으로 승격되었는데 이 루테니아 왕국이 러시아, 벨라루스와는 구분되는 본격적인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우크라이나인의 민족성의 시작점이다. 루테니아 왕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 왕국 및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 등 다사다난한 역사를 통해 문화적 또는 사회적으로 서유럽 또는 중유럽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적, 계몽주의적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고 반면 북쪽의 삼림 지대를 중심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로 부터 고립된 러시아는 모스크바 공국 시절 통칭 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리우는 몽골 제국의 봉신국 또는 속국으로 있는 수백년의 기간 동안 [[몽골]], [[튀르크]]의 전근대적이고 억압적이고 후진적인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러한 영향들은 몽골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남아있는데 대표적인게 러시아의 전제적이고 억압적인 절대왕정체제이고 또 하나는 가혹한 농노제이다. 이 러시아의 전제적이고 억압적인 절대왕정체제와 가혹한 농노제는 러시아인들에게 각인되어 러시아인으로 하여금 자유의지와 인권에 대한 의식이 박탈된 노예로 만들었다. 이렇게 두 민족간의 민족성 차이는 이들이 만든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후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고수하고 있으며 2013년의 유로마이단 사태에는 전국민적인 격렬한 시위를 통해 실정을 일삼던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적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푸틴의 장기 독재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이후에 내린 강제적인 총동원령에 개돼지 노예 마냥 입도 뻥끗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우크라이나인은 평균적으로 러시아 보다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 많고 [[적발]]이나 [[흑발]]이 많은 반면, 러시아인은 타타르의 멍에 시절 몽골, 타타르, 우랄족과의 잦은 통혼으로 인해 한국인인 우리가 봐도 이목구비가 동양적인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대신 [[금발]]이나 [[청안]]을 가진 사람이 좀 더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