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군 (문단 편집) === 독립과 재창군, 그리고 동시에 시작된 군축 === ||<-3> [[파일:attachment/P1-BP535_UKRMIL_G_20140324170604.jpg|width=100%]] || ||<#D72D5C> '''{{{#FFFF00 1991년과 2011년의 우크라이나군 군사력 비교}}}''' || 현재는 구소련에서 독립할 당시와 비교하면 군사력이 매우 줄어들었는데, 위는 1991년과 2011년의 군사력을 주요 요소들로 나누어 비교하여 정리한 표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우크라이나는 독립하였고, 자연스럽게 소련군 16개 군 관할 구역 중 우크라이나 지역에 주둔 중이던 키예프, 오데사, 자카르파티야 3개 군관구 소속 2개 전차군 내 3개 군단 예하 14개 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우크라이나 정부가 인수받아 우크라이나군을 (재)창설했다. 당시 병력은 78만 명, 전차 6,500대, 전술기는 1,500대나 되었으니 유럽의 상당한 강군으로 속했으며, 병력으로는 유럽 1위였다. 또 소련 시기에 배치된 핵무기도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독립 당시의 핵무기 보유량은 세계 3위였다. 다만 소련의 핵무기를 물려받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은 애시당초 핵무기 기술이 없었기에 핵무기를 운용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신생 우크라이나는 독립과 함께 닥쳐온 [[초인플레이션]]과 공화국간 산업연계 마비로 인한 경제난으로 인해 그러한 무기들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이 못되었고, 그나마 있는 소총같은 무기류도 지하경제가 융성했던 사정상 마피아와 올리가르히들이 매입하거나, 외국에게 밀매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90년대 러시아 옐친 정권은 친서방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푸틴에 비하면 온건하고 유화적이었다. 냉전이 종식된 후 세계는 영구적인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고 각국은 앞다투어 군비를 축소했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수백 대의 전차를 제외한 나머지 가운데 도저히 못쓸 정도의 무기들은 폐기 혹은 제3세계에 헐값으로 내놓고 나머지도 몽땅 비축하면서 사실상 현역으로 남는 중무기는 10분의 1 수준으로 급격히 축소되었다. 소련제 [[항공모함]] [[랴오닝급]]도 [[중국]]에 팔았다.[* 우크라이나 국토에서 바다라고는 [[튀르키예]]로 틀어막힌 좁아터진 [[흑해]] 바다 뿐이기 때문에 항공모함은 지나치게 과도한 무장이고, 우크라이나에게 애물단지였을 뿐이다.][* [[중소관계|중국과 소련은 전통적으로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소련-러시아는 이런 중요한 전략병기는 아무리 중국이 비싼 값을 부르며 애원해도 팔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전략적인 무기라고 보기는 힘든 [[Tu-22M]]조차 팔지 않는다. 독립 직후 돈이 급한 우크라이나였으니까 팔아치운 것이다. 항모에 실을 [[함재기]]도 러시아는 핑계를 대고 안 팔려 해서 중국은 [[선양 J-15|결국 함재기도 우크라이나를 통해서 해결했다.]]] 물론 이런 무기들을 폐기한 건 아니므로 여차하면 다 개장해서 내보낼 수는 있겠으나, 그 대가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수의 청년들을 강제징집해야 하고 국방비도 몇배로 늘려야 하므로 그렇잖아도 막장이 된 국가경제는 말 그대로 안드로메다로 가게 된다. 그래서 돈바스 내전 중에 중무기 손실이 만만찮은데도 다 개장해서 반군을 밀어버리지 못하고 손실분만 보충하는 식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때 러시아 및 서방과의 합의로 보유하고 있는 핵을 모두 러시아에게 넘기고 비핵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보유한 핵을 모두 가져가는 대가로 경제 지원을 약속했지만, 정작 비핵화하자 러시아는 경제 지원을 대폭 축소해 버렸고[* 물론 이 당시에 러시아 또한 경제 붕괴로 우크라이나에게 도저히 지원해줄 여력이 안되었기는 했다. 애초에 자국 노인들과 공무원들에게조차 연금과 월급을 제때 못주는 나라에서 (몇년전까지만 하나의 나라였다해도) 외국에 경제지원을 해줄 돈이 어디 있을리는 없다.] 러시아와 냉각기에 들어가게 된다. 1995년, [[레오니트 쿠치마]]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이후 우크라이나의 극심했던 경제 위기와 혼란도 다소 진정되었고, 쿠치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군의 탈러시아화, 현대화, 서방화 개혁을 추진하며 서방권 국가와 긴밀히 협조하였다. 쿠치마 정권은 현대적 신무기를 도입하여 군 체질을 개선하고자 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재정난이 군 현대화 개혁의 발목을 잡았다. 2003년 [[이라크전]] 당시 우크라이나는 동구권 국가들 중에서는 특이하게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병하여 다국적군으로 주둔했다. 쿠치마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친서방 정책을 추구했으나, 정권 후기에 대규모 정치 스캔들이 터지며 민중들의 반대 시위('쿠치마 없는 우크라이나' 시위)가 발생하자 쿠치마는 친러 세력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쿠치마의 지지율은 10%대를 맴돌정도로 낮았던지라,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집권을 위해서 [[빅토로 유셴코]]의 우리 우크라이나와 [[율리아 티모센코 블록]]과 선거연합을 꾀했고, 공산당과 친서방 자유주의 세력 정당이 서로 연립정권을 구성하는 진풍경이 펼쳐질뻔 했지만, 단일후보 추대 방침에 공산당이 거부감을 보이면서 연합은 무산되었다. 이후 공산당은 쿠치마의 정당인 지역당과 손을 잡고 여러번 연립정당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유로마이단 이후 해산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 쿠치마 정권 후기인 2000년대 이후 우크라이나군은 여러 사단이 여단급으로 규모가 축소되고 2004년 독립 군종이었던 방공군을 공군에 통합시키는 등 군체제 개편을 명목으로 감군이 지속되었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이 일어나며 우크라이나 민중들 사이에서는 반러, 친서방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당시 대선에서 러시아로부터 [[다이옥신]] 테러를 받은 친서방 후보 [[빅토르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우크라이나군의 친서방화, 탈러시아화는 가속화되었다. 이후 미국 주도의 [[Missile Defense|MD]]에 찬성하는 한편 러시아 해군기지 대여를 철회하는 등 러시아와는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유셴코 정권은 우크라니아군의 서방화, 선진화 그리고 탈러시아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했으나 고질적인 재정난으로 한계에 봉착했다. 특히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로 우크라이나 경제가 직격탄을 맞으며 군의 개혁이 지체되었다. 게다가 유센코 정권은 NATO 가입을 위해 지속인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2008년 [[NATO]] 정상회의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반대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이 좌절되었다. NATO는 우크라이나가 기준을 충족시키면 향후 가입할 수 있다고 하여 가입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2008년 하반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초래된 세계 경제 위기가 우크라이나를 강타했고 우크라이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경제난으로 유셴코 대통령의 인기가 급락하여 2010년 대선에서 친서방 유셴코 정권이 패배하고 친러파 [[야누코비치]] 정권이 들어섰다. 이후 우크라이나군도 다시 친러시아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서방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상당했기에 야누코비치 정권은 일단 겉으로는 중립적인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는 눈속임일 뿐이었고, 실제로 야누코비치는 정권을 잡은 4년 동안 러시아 [[크렘린궁]](대통령궁)의 의중을 충실히 받들어 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감군했고 친러시아화, 탈서방화를 진행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경제난을 이유로 국방 예산이 대폭 삭감되었다. 야누코비치 정권 내내 국방 예산 삭감이 지속되었다. 야누코비치는 취임 한달여만인 2010년 4월 러시아 해군기지 대여 취소를 철회하고 2030년까지 연장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을 매우 기쁘게 했다. 또 크림 반도에 같이 주둔해 있는 러시아 해군과 교류를 강화했고, 공군 또한 러시아군과 공동 방어 계획을 구축하는 등 러시아군과 협력을 강화했고, 이 과정에서 군내에 친러파 장교들이 늘어갔다. 또 야누코비치는 국방장관과 정보부 장관에 러시아 이중국적자를 앉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의 재정난을 이유로 군대 규모를 축소하였고, 보유 무기를 외국에 팔았다. 장비 노후화를 이유로 많은 무기를 스크랩 처리했으나 이를 보충하기 위한 새로운 무기 도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후화를 빌미로 군수 산업을 축소, 파괴하였다. 군사 훈련을 위한 예산도 삭감했다. 그나마 있는 장비도 예산 삭감으로 정비와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러시아군과의 군사 교류를 강화했고, 나토와는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2013년 10월 야누코비치는 군현대화를 핑계로 징병제를 폐지하였고, 5년 후인 2018년까지 육군 병력을 18만 명에서 12만 명으로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군 병력감축은 어쩔수 없는 일이기는 했던것이 1990년대 초중반의 경제난으로 우크라이나의 출산율이 2명대에서 1명대 초반대로 급감했고, 야누코비치의 집권기는 징병인력들의 수가 한창 급감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력감축이 어쩔수없는 일이었다고 쳐도, 남는 예산을 기계화에 투자를 하는 등 대안을 마련했어야 하는데 그걸 도외시했을 뿐만 아니라 국방 예산 자체를 절반 이하로 대폭 줄인 것에서 야누코비치 정권은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