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국 (문단 편집) == 멸망 후 == 이후 우크라이나는 혼돈 그 자체였다. 남부에서는 [[네스토르 마흐노]]가 이끄는 [[아나키즘]] 봉기가 이어졌고, [[캅카스]]에서 세력을 키운 [[안톤 데니킨]]의 백군 세력이 우크라이나 동부로 진군하였다. 또한 새로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의 군대가 서우크라이나로 진군해 들어왔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폴란드군과 붉은 군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외세의 침공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서우크라이나 잔존 군대는 1920년 4월,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맺어 동맹을 맺었다. 그 즈음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남러시아 백군을 무너뜨린 때였고, 서우크라이나의 시몬 페틀류라의 군대와 연합한 폴란드군은 공세하여 [[키이우]]를 탈환했지만, [[세묜 부됸니]]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역습을 당해 패주하였고, 8월에 [[바르샤바]] 인근까지 후퇴하였다. 하지만 폴란드군은 역전에 성공하여 다시금 소련군을 패퇴시키고 진군하였으며, [[러시아 내전]]에 집중하기 위해 [[블라디미르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는 교섭을 제안하였다. [[리가 조약]]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마무리되었고 페틀류라 세력은 그 동안 타르누프에 망명정부를 수립하였지만 폴란드 정부는 전쟁 직후 내쫓았다. 그 후 페틀류라는 [[파리(프랑스)|파리]]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 마흐노도 파리로 망명했는데 결핵과 생활고로 골골대던 마흐노의 비참한 모습을 본 유대계 [[아나키스트]]가 이에 분노해 페틀류라가 우크라이나에서 저질렀던 유대인 학살과 마흐노에 대한 복수로 페틀류라를 살해했다. 이후 그 유대인은 무죄로 풀려난다. 재판에 관한 위키피디아 문서가 존재한다. 마흐노는 결국 영양실조로 인한 결핵으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