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징헝 (문단 편집) === [[반장전쟁]]에서 [[중일전쟁]]까지 === 북벌 말기 [[탕산회의]]에 참여하였다. 장제스가 장황사변의 주모자들에 대한 온건처리를 고집하자 장제스와 불화를 빚었으며 지방분권을 위해 정치분회 존치를 주장하다가 국민당 2기 5중전회에 불참하고 상하이에 칩거하였으나 장제스의 설득으로 난징으로 복귀, 1928년 10월 8일 중앙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8년 12월 27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의 추천으로 [[편견회의]] 편견위원으로 지명되었다. 1929년 1월 22일, 편견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월 25일 육군군관학교 교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2월 [[호남 사건]]이 발생하자 [[리쭝런]]의 요청으로 중재에 나섰으나 결국 장제스가 계계군벌 토벌을 결정하면서 [[반장전쟁]]이 발발했다. 1928년~1929년 시기에 꾸준히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나키즘 운동에 나섰으나 아나키즘을 사회주의의 일파로 인식하게 된 국민당 상층부에서 아나키즘을 탄압하고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에 따라 교육개혁을 위해 설치했던 대학구, 대학원제를 폐지함에 따라 평생에 걸쳐 노력한 교육혁명 운동이 좌절되는 슬픔을 맛보았다. 이후 공직 활동을 거의 중지하였다. 반장전쟁 후반기의 [[중원대전]] 과정에서 불거진 약법제정 논란에 있어 약법 제정을 반대하는 입법원장 [[후한민]]에 맞서 약법 제정을 지지했다. 1931년 2월 [[탕산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장제스 지지 입장을 고수했으며 1931년 3월 2일, [[쑨커]], [[위유런]], [[주페이더]], [[왕충후이]] 등 중앙집행위원들과 함께 훈정 시기 약법 제정을 건의하여 약법제정 기초위원에 선출되었다. [[1차 양광사변]]이 터진 후 광저우와 난징의 통합을 주선했으며 [[만주사변]] 후 거국적인 협력을 주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충칭으로 이동해서 항전을 수행했으며 1943년 국민정부 주석 [[린썬]]이 사망하자 국민정부 주석직을 제의받았으나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국민정부 주석직은 장제스가 계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