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징헝 (문단 편집) === 초기 활동 === 1865년 강소성 상주부 양호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유학공부를 받다가 1887년 수재가 되었고 1891년 향시에 급제하여 수도 베이징에 올라가 3년 연속 열린 두차례 회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때 베이징의 유신파들로부터 서양 학술을 접하게 되면서 중국의 전통교육을 비판하게 되었다. 1897년 북양대학당 교수가 되어 한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캉유웨이]], [[량치차오]]의 변법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캉유웨이의 <공차상서>에 연명하여 [[변법자강운동]]을 지지했으나 1898년 [[무술정변]]이 일어나면서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모두 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우징헝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무술정변]] 때문에 기존 체제의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과학기술을 기기음교라고 배척하는 사대부들의 태도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우징헝은 1899년 남양공학 학장이 되어 군지회(群智會)를 조직, [[차이위안페이]] 등과 교류하며 과학 보급을 주장하며 서구화를 주장했다. 1902년 일본으로 유학, 홍문사범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02년, 세이죠 고등학교를 입학하고자 하는 청국 유학생들을 위해 주일 청국 공사관 앞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청국공사 차이쥔의 개입으로 쫓겨나고 이 때문에 자결을 기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개입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귀국하여 [[차이위안페이]] 등과 함께 <애국학사>를 조직하여 <소보>를 창간, [[서태후]]를 비판하고 반청활동을 벌였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인하여 1903년 5월, 상하이를 떠나 [[영국령 홍콩]]을 거쳐 1903년 9월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영국 망명 시기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진화론, 고인류학, 사진술, 인쇄술을 공부하였으며 1905년, 중국 동맹회원인 조아백의 소개로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가입 시에 동맹회 서약서를 보고 웃으면서 "우리들의 혁명이 문자 그대로 혁명인데 어떻게 캉유웨이가 했던 것에서 배울 수가 있는가?"라고 했지만 옆에 있던 다른 회원들이 "우리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 나는 이미 이 서약서에 이미 서명하였다."라고 하자 동맹회에 가입했다. 1906년,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접하게 되어 무정부의자가 되었다. 이에 [[장런제]], [[리스쩡]] 등과 함께 파리에서 <신세기> 그룹을 조직하여 편집인을 맡았고 필명으로 중국의 전통사상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중국을 서구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당을 부정하고 교육혁명을 통해 중국을 개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8년, 장병린, 도성장 등이 쑨원이 금전을 모으고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크게 비판하여 쑨원이 궁지에 몰리자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우징헝은 쑨원의 요청에 따라 쑨원이 사용한 금전내역이 혁명을 위해 사용한 것임을 증명하면서 쑨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1910년, 왕징웨이가 순친왕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체포되자 베이징에 로비를 하여 왕징웨이를 구해줄 것을 부탁받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1912년 1월에 중국으로 귀국, 중국사회당 집회에서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를 비판하며 아나키즘을 선전했다. 1912년 2월, 진덕회를 조직하여 금욕주의 계율을 따르는 병종 회원이 되었고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를 창립하여 중국 청년들에게 프랑스 유학을 떠날 것을 권유,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개량주의 입장을 취하며 민국에 대해 아나키즘 사회혁명을 이룩하기 전까지의 필요악 단계로 규정하고 민국을 옹호하였다. 이 때문에 극렬 아나키즘으로부터 아나키즘의 선봉장은 되지 못할망정 평담이나 일삼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13년, 일본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장쥐]]가 참의원에 선출, 참의원 원장이 되자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무관주의를 배반한 것이라고 격렬히 비판하였으나 우징헝은 장쥐의 의원 출마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이 때문에 국민당에 접근하면서 정당에 몸담으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탕산대학 학장이 되어 교육활동에 종사했다. 이때 총통 중심제를 주장하는 위안스카이에 맞서 정당정치를 주장했다. 1913년 8월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법률유지회를 조직하여 위안스카이의 독재를 비판했고 1913년 [[계축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여 참가하였다가 [[위안스카이]]의 탄압으로 다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