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왕 (문단 편집) === 폐위와 죽음 === 출전하기 전부터 <4불가론>을 들어 반대한 이성계는 조민수 등과 함께 군대를 돌려('''위화도 회군''') 개경을 포위한 후 함락하고 최영을 제압한 뒤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우왕은 다시 [[꼭두각시]] 군주로 전락했다. 그런데 우왕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기가 남아 있었는지 친히 무장을 하고 [[환관]] 80여 명을 무장시킨 후, 이성계를 참살하러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찾아갔으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당시 [[군영]]에 그대로 남아있던 데다가 이성계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으려 해도 [[태종(조선)|이방원]]이 이미 대피시킨지 오래라 실패했다. 혹자는 "이성계가 군영이 아닌 집에 머물렀다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일 이성계가 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사를 앞두고 이성계가 아무런 경계 태세없이 편히 집에 머물러 있었을리 만무한 데다가, 이성계라는 인물 자체가 [[무공]]으로 치면 한국 역사에서 손꼽을 수준의 인물이기 때문에 무장한 환관 80명은 우왕의 [[무리수]]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드라마 <[[정도전]]> 제28회에도 나오는데 방영 당시 몇몇 시청자들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지적했다가 엄연히 《[[고려사]]》에 기재된 [[정사(역사)|정사]]였다는 사실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태종 이방원>에서도 묘사되며, <정도전>에서는 미리 대비하던 이성계에게 역관광당하고, <태종 이방원>에서는 하필 이성계가 군영에 가 있어서 도모하지 못하자 그의 가족이라도 노렸으나 그곳에 있던 조영무 및 가별초와 싸우다 이방원과 조영규가 오면서 중과부적으로 실패하게 되는 걸로 나온다.] 결국 이 일로 분노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이인임을 몰아낸지 고작 4개월만에 [[폐위]]당한 뒤 [[강화도]]로 [[유배]]보내졌다. >우왕 14년(1388년) 6월 병오일. 이날 밤에 우왕이 환수(宦竪) 80여 명과 함께 무장한 채 태조와 조민수(曹敏修), 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 >《고려사》 권137, <열전>50 우왕5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과 이성계는 이인임을 [[탄핵]]하는 한편 [[사돈]]의 형[* 공양왕 왕요의 동생인 정양군이 이성계의 7남 [[무안대군]]의 장인이었다.]인 정창군([[공양왕]])을 옹립하려 했지만 학계의 거두였던 [[이색(고려)|이색]]과 정적 조민수의 결사 반대로 인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다. 이들은 귀양간 이인임을 복권시키려 했지만, 이인임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우왕은 강화도가 개경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좀 먼 [[경기도]] [[여주시]]로 옮겨졌지만, 왕위를 탈환하기 위하여 [[김저]], [[정득후]]와 함께 이성계를 암살할려는 계략을 꾸몄다. [[곽충보]]도 불러서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지만 중도에 배신한 곽충보가 이성계한테 밀고했고, 이성계를 죽이기 위해 그의 자택에 간 정득후와 김저마저 모두 현장에서 발각됐다. 결국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자결했고, 김저는 붙잡혀서 순군옥에 수감된 뒤 대간에게 신문을 받았다. 이후 우왕은 [[강원도]] [[강릉시]]로 또 옮겨졌는데, 아들 창왕 때 우왕을 복위하려 한다는 모략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색과 함께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를 쫓아낸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니 창왕을 폐위하고 진짜 [[왕(성씨)|왕씨]]를 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폐가입진론>을 내세웠고, 이에 아들 창왕도 폐위당했다. 이후 옹립된 공양왕은 우왕과 창왕의 처형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물론 <폐가입진론>에 따라 이성계 입장에서도 우왕과 창왕을 언젠가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동정하는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일단은 우왕과 창왕의 처분을 보류하고자 했다. 반면 공양왕 입장에서는 우왕과 창왕의 존재가 본인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한편 사형시켰을 경우, 이성계가 혼자 온갖 비난을 다 들어 먹을게 뻔하므로 사형을 밀어붙였다.] 이성계도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란 뜻.)을 외치며, 조선 개국을 계획하고 강릉에 유배된 두 부자의 처형을 명령했다. 결국 우왕은 신돈의 혈육으로 몰려 향년 25세의 나이로 처형당했고, 아들 창왕 역시 같은 해에 10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司宰副令尹會宗上 請誅禑 昌。王歷問諸宰相皆黙然 我太祖獨曰 此事不易。旣以安置江陵 聞于朝廷 不可中變。且臣等在 禑雖欲爲亂何憂哉 王曰 禑多殺無辜 宜其自及。命知申事李行下旨 遣政堂文學徐鈞衡于江陵 誅禑 藝文館大提學柳玽于江華 誅昌。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공양)왕이 재상들 하나 하나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다들 말이 없었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홀로 의견을 말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왕을 강릉에 안치했다고 명나라 조정에 이미 알린 터에 중간에 말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또 저희들이 있으니 우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들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우왕은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지은 후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분부해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鈞衡)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처형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유구(柳玽)를 강화에 보내 창왕을 처형하게 했다. >---- >《[[고려사]]》 공양왕 원년 [[야사(역사)|야사]]에는 사망할 당시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에게 >"[[왕(성씨)|왕씨]] 일족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 고 외치며 웃통을 벗어 그 용 비늘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 야사와 연결되는 설화로 <[[작제건]] 설화>가 있다.][*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우왕의 최후 장면에서 용 비늘 이야기를 채용했다.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더 각색되어 우왕이 직접 자기 몸을 인두로 지져 상처를 낸 후 이를 용의 비늘로 주장하다가 참살당한다.] 이 야사를 채택한 저술 중에 [[이중환]]의 《[[택리지]]》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용녀에 대한 일은 믿을 수 없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태조(왕건)가 낳은 자녀들 중에 양쪽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다 한다. 태조의 외가가 용이고, 용녀가 바다로 돌아가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다시 용이 된 것은 어린 딸이 시집가서 혹 왕자를 낳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왕실의) 여자 중에서 비늘이 없는 사람은 신하에게 시집보냈으나, 비늘이 있는 사람은 모두 대를 잇는 임금의 후궁으로 삼아 윤기(倫氣, 윤리와 기강)를 더럽히는 부끄럼도 서슴지 않았다. 중기에 들어서는 여동생을 비로 삼는 임금까지 있었다. 《송사》(宋史)에서도 "이러한 일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 하였으나, 하지만 그런 일은 오직 왕가에서만 그러하였고 민간 풍속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 회군|위화도에서 회군]]한 뒤에 왕우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시켰다. 그리고 [[공양왕]] 요(瑤)를 임금으로 세우고, 또 공양왕으로 하여금 우를 강릉에서 베어 죽이도록 시켰다. 우가 형을 당하게 되자 겨드랑이를 들어 보이면서 "나를 신씨(辛氏)라 하지만 왕씨는 용의 종내기이므로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는데, 너희들은 와서 보아라." 하였다. 참관하던 사람이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이것은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 >《다시 쓰는 택리지》 1권, 신정일 저, 166페이지 다음 문단의 내용은 [[전어도]] 항목 전설 부분에 서술되었듯이 2006년 기고된 [[네이버]] 블로그 글 이외에서는 기록이 확인된 바가 없다. 용 비늘 이야기에서 나아가 [[태조(조선)|이성계]] 일파가 우왕의 목을 베려고 했는데 용의 후손이라서 병장기가 먹혀 들어가지 않아 죽이지를 못하자 이성계가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검[* 아버지 [[이자춘]]이 조상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나온 것을 이성계에게 물려준 검][* 조선 국왕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칼, 즉 [[전어도]](傳御刀)로 알려진 그 검이다.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이 제작한 복제품이 실유물로 남아 있는데 150cm짜리 괴물검이다.]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대사]]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전어도'를 꽂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며,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박살난 전어도와 금이 간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무덤만 있다면 프랑스 제2제정의 [[나폴레옹 3세]]처럼 현대 과학으로 생부를 판별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덤에 관한 기록 자체가 없고 발견되지도 않았다. 다른 역사의 여러 폐위된 군주들이 일단은 왕족이기는 한데 다른 이런저런 잘못으로 폐위당하는 것과 달리 우왕은 조선 창업 세력에 의해 반역자인 신돈의 아들로 간주당해 처형되었으므로 무덤에 제대로 안장되었을지 의문이다. 아들 창왕과 함께 [[역적]]의 시신으로 간주돼 들판에 걍 버려졌을 가능성도 상당한 편. 다만, [[경기도]] 내에 예로부터 우왕의 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무덤이 있기는 하다. 이 때 위에서 언급된 최영의 서녀인 영비 최씨가 우왕의 유배지까지 따라갔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이 처형된 후 밤낮으로 곡을 하다가, 우왕의 시신을 끌어안고 자는 것은 물론 시신에 밥을 지어 올리고 하며 시신을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 초의 《[[고려사]]》, 《[[동국통감]]》 등은 우왕을 '신우'(辛禑)라고 기록하며 정통성을 깎아내렸다. 폐위 후 복위 시도도 좌절되어 시호조차 올려지지 않았는데 이 점은 아들 창왕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폐위되거나 쫓겨난 황제나 왕족 등이 추존되거나 그렇지 않아도 왕자로서 기초적인 시호라도 받은 것에 비하면 결이 다르게 비참한 것이고, 이런 예는 우왕의 죽음을 제외하면 전무후무한 것이다.[* 창왕 폐위 후 망국의 군주가 되었으나 조선으로 부터 시호는 받은 [[공양왕]], 폐위 후 끝끝내 왕으로 추존된 [[단종]]이나 반정으로 쫓겨나서도 군호라도 있었던 [[연산군]], 마찬가지로 군호가 있음은 물론 훗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혜종이라는 (사적으로 내린 시호인) 사시까지 올려준 [[광해군]], 그리고 왕으로서 추존은 아니더라도 생전 자신의 지위인 세자로서 추존되는데 성공한 [[소현세자]]나 [[사도세자]]는 물론, 다른 후계 정권에서 정식 시호라도 내린 [[청나라]] [[선통제]], 제위 선양 후 왕호를 받고, 살아 생전 황제로서의 대우라도 유지되었던 [[후한]] [[헌제]] 및 [[조환]] 등과는 결이 다르게 우왕 부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