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왕 (문단 편집) === [[위화도 회군]] === 이 무렵 원나라를 몰아내고 새로운 대륙의 승자가 된 명나라와는 외교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재위 초 친원 정책을 취하던 실권자 이인임 등 권문세족들이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해 버린 일도 있었으며 금, 말, 포 등의 막대한 세공을 강제하여 고려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는데 사신단이 세공을 위해 가져가던 말들을 비루먹은 말로 바꾼 뒤 차익을 이인임 일당에게 [[뇌물]]로 바치는 [[케이스]]도 많았다. 우왕 시기는 원나라와 명나라 사이의 일종의 양팔 외교기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이인임의 영향으로 이미 원나라는 공민왕 말기에 [[베이징|대도]]를 상실한 뒤였다. 이인임의 친원 외교도 일시적인 것으로 점점 친명쪽으로 기우는 것은 분명했다. 이인임이 쫓겨나기 직전인 1387년에 명나라의 관복([[익선관]]과 [[곤룡포]]) 등을 습용하기로 승인받은 것이 그 예이다.[* [[위구르 제국|회흘]] ([[위구르#s-1]]) 출신으로 공민왕 때 온 학사인 [[설송]]의 아들 [[설장수]]가 사신으로 다녀왔다. 4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훗날 위화도 회군 이후 [[창왕]] 폐위와 조선 건국에 동의하며 영달을 누렸다.] 이전에는 공민왕 [[어진]]에서 보듯 [[송나라]]의 관복을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인임 일당이 숙청된지 2개월만인 1388년 3월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은 >"철령 이북은 우리 땅이니 내놓으라" 라며 강짜를 놓았다('''철령위 문제'''). 명나라가 무리한 요구를 계속해 대결이 심화되자 공민왕때 어렵게 되찾은 땅을 내놓으라는 명나라에 반발한 재상 최영은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우왕도 이를 승인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요동 정벌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반대하는 신하까지 죽여가며 강행했음에도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고 요동 정벌 계획을 실현해 나갔다. 아직 왜구가 약탈을 지속하고 있던 농번기에 이는 백성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으며 가망없는 원정에 자신의 주 세력을 대거 참여시킨 이성계에게도 큰 타격이 될 터였다.[* 원정에 대한 회의는 다른 장수들에게도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화도 회군 당시, 창왕때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조민수(고려)|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이성계의 <4불가론>이 비판받기도 하지만 당시 고려의 상황이나 이성계의 <4불가론>의 내용들을 보면 대국에 허리를 굽히는 비굴한 태도라고만 말하기 어렵다. 요동 정벌을 하겠다면 무더운 여름이 아니라 병량을 확보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한 가을로 잡자고 건의한 것도 묵살됐다.] 이때부터 이성계는 우왕와 최영에게 본격적으로 불만을 품고 일을 벌일 시기를 노렸을 걸로 보인다. 준비가 다 끝나고 출정 준비가 되자 최영도 총사령관 자격으로 출진하려 했으나 우왕은 믿을 사람이 최영 밖에 없었던지 >"가지 마라" 며 청했고[* 최영이 [[목호의 난]]을 토벌하러 [[제주도]]에 내려가 있었을 때 우왕의 아버지 [[공민왕]]이 홍륜 일당에게 시해당했다. 이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는 우왕으로서는 최영이 곁에 없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최영은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으며, 이성계와 조민수 등만이 북방으로 출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왕에게 결정적인 패착이 되고 말았는데 우왕은 사실 요동 정벌 때 [[평양시|서경]]까지 나아가 동향을 지켜보았고 최영도 함께 서경에 있었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이 시작되자 빠르게 개경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도중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이로서 대응 시간은 더욱 늦어졌다. 이후 고려 전군 50,000명이 이성계의 지휘로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며 최영이 죽고 우왕은 몰락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