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왕 (문단 편집) === [[무진피화]] === 우왕이 조금 성장하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원나라가 완전히 북방으로 물러가자 왕은 이인임의 전횡을 보다 못해 실권을 되찾고 싶어졌다. 이인임이 건강상 문제로 사직한 후로도 그 일당인 염흥방과 [[임견미]] 등 신흥 [[귀족]]에게 전권을 옮겨주었다. 그들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막대한 토지를 약탈하고 있었고 국고는 비었으며 중신인 경복흥은 자포자기로 술독에 빠져서 수수방관만 하다 실각했고, 또다른 중신인 최영은 탄식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이런 상황은 우왕의 사치 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방해했다. 마침 염흥방 등의 난행으로 인한 '''[[조반]]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군부의 실력자로 인망이 높던 최영이 현상 타파를 결심하게 되었고, 우왕은 그런 최영의 손을 잡고 이인임 일당의 제거를 획책했다. 최영은 친밀한 후배 무장 이성계를 끌어들였고 이 둘의 힘으로 결국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했다. 1388년 1월 이 공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재상]]이 되어 고려 정계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특히 최영은 정계의 실세가 된다. 우왕은 최영에게 전권을 맡기는 동시에 본인도 어느 정도 정사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우왕은 최영을 자신의 돈독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그의 딸을 아내로 맞기도 했는데 이 때 맞이한 후비가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寧妃 崔氏)였다. 엄밀히 따지면 영비 최씨는 최영의 [[서녀]]였고 최영도 이 때문에 곤란해하며 딸과의 결혼을 반대했었으나 우왕의 고집으로 인해 결국 영비 최씨를 들였다. 자신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최영을 중용해서 이인임 일파를 물리치고 최영을 후견인으로 삼았다는 면에서 적어도 당시 우왕의 정치적 감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