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왕 (문단 편집) === 기타 제설 === 현재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냐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의견이 대다수이고, 공민왕의 아들일 것이라 보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요즘처럼 DNA 검사라도 하지 않고서야 당대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완벽한 입증 및 반박이 불가능했다.[* 왕자가 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도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이 되었다. 물론 자라면서 외모가 왕과 빼다박았다든지, 그 외에 각종 유전적으로 동일한 특성이 나타나면 대체로 해결이 되었지만 재수없이 외탁이라도 해버리면 답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의혹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도록 왕과 결혼한 여자는 궁 안에만 박아두고, 궁 안에 남자 구실 할 수 있는 남자는 왕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대규모 스캔들이 터지지 않고서야 왕비나 후궁이 낳은 아들은 무조건 왕의 아들이니까. 그러나 우왕은 공민왕이 밖에서 데려온 아들이므로 그러한 안전장치가 없는 사생아다. 하다못해 조선의 제21대 [[영조]]도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일지언정 일단 후궁이 된 뒤에 낳은 둘째라서 아버지가 [[숙종(조선)|숙종]]인 것은 분명했다. 우왕은 영조만큼도 안되는 혈통 증거력을 가진 셈이다.] 우왕의 유골을 찾을 수도 없는 마당에 이젠 영영 밝힐 방법도 없다. <우창비왕설>에 의한 <폐가입진론>에는 명확한 물증이 없으며 둘 다 왕씨가 맞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우왕이 유달리 혈통 면에서 트집이 잡힐 만한 약점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반야가 우왕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사]]》에선 반야가 만삭일 때 신돈이 친구인 승려 능우(能禑)의 모친의 집으로 보냈고 반야는 그 집에서 아이를 낳았으나 돌이 되기 전 아이가 죽어, 능우가 죽은 아이와 닮은 아이를 몰래 데려와 기르다가 신돈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참고로 현대의 사학계엔 우왕의 생모가 반야라는 것도 거짓이고, 실제 생모는 순정왕후 한씨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능우라는 인물이 순정왕후 한씨의 친척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우왕이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고, 학계에서도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우왕은 순정왕후 한씨와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저 이야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명덕태후가 공민왕 시해라는 위급 상황에서 공민왕이 자기 자녀라 인정하던 모니노 대신 [[왕토크토아부카|다른 왕씨 종친]]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점을 우왕의 혈통을 의심하는 증거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명덕태후]]가 우왕 대신 다른 종친을 보위에 앉히려 한 이유는 우왕의 혈통보다는 그의 모계가 천출이라는 것이 큰 이유였다는 게 중론이다. 조선은 정비 소생의 적장자가 없을 경우 적차자([[정종(조선)|정종]], [[예종(조선)|예종]], [[효종(조선)|효종]])나 후궁 소생, 중인 출신([[경종(조선)|경종]]) 심지어 서자([[영조]])이라 해도 왕의 아들이면 후계 계승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종(조선)|정종]]에게 서자밖에 없다는 논리로 적자인 [[태종(조선)|태종]]이 정종의 양자가 되어 즉위한 걸 두고 조선 초기까지는 관념이 남아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이미 두 차례의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태종이 왕위 계승을 위한 마지막 명분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그렇다고 꼭 틀린 소리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조선 초기만 해도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방계 왕자들도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서 적자를 많이 낳았기에, [[선조(조선)|선조]] 이전까지 쭉 정실 소생의 적자가 왕으로 즉위했고 서자 출신 왕이 없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각한 저출산과 요절을 겪으면서 조선 왕실에선 남녀 안 가리고 씨가 마르다시피 해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고려는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의 혈통 또한 중요했다. 게다가 고려 왕조는 <[[훈요십조]]>에서부터 이미 >"적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되, 적장자가 부실하면 다른 적자가 이을 수 있다." 라고 함으로써, 비장자 계승 및 형제 계승에도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실제로도 장남을 놔두고 형제 계승한 사례가 많았다. 건국 초기부터 괜히 유력 호족이나 [[근친혼|왕족 내 종친과 족내혼]]을 한 것이 아니다. 우왕의 경우, 부친은 공민왕이나 모친이 천민 출신인데, 명덕태후는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당연히 모계 혈통도 감안했어야 했기에 우왕의 즉위를 반대한 것이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왕, version=207, paragraph=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