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생학 (문단 편집) == 역사 == 사실 이 '우생학'이라는 단어는 비록 20세기에 와서 나왔지만, 그 개념 자체는 이미 고대부터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장애인]]과 [[기형아]]의 차별대우가 바로 그 증거이다. 대표적인 예가 [[스파르타]]의 장애 [[영아 살해]]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장애인 배척사상. 그것이 마치 학문인 양 둔갑한 것은 사실상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대두, 그리고 그 제국주의와 파시즘 시대 강국이었던 나라들이 자기들의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학문인 양 호도한 것. 유전의 방식이 근대에 와서 밝혀졌을 뿐이지, 유전이라는 개념,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더러운 핏줄이 더 이상 대를 잇지 못하도록 한다'''[* 지금은 [[유전]]을 [[유전자]]로 설명하지만, 고대인들은 자식에게 부모의 피가 흐른다고 믿었다. '혈통', '핏줄, '순혈' 같은 말도 다 이런 관념에서 나온 말.]는 생각도 자연히 그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우생학적인 관념 중에서 가장 막장인 것은 '[[근친상간]]'. 당시 근친상간을 한 이유로는 [[왕족]]은 왕족끼리, [[귀족]]은 귀족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 [[귀천상혼]] 배제, 정치적 이유, 혹은 '''우리 가문의 피가 가장 우월하니''' 다른 가문의 피가 섞이면 안되고 순수한 우리 가문의 피를 물려줘야 한다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가 전무하며, 후술하겠지만 이로 인해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는 사실상 전무했으며 오히려 쓸만한 인적 자원이 점점 감소하거나, 끝내 가문 구성원들이 생식 능력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직계 혈통이 끊겨 과거의 위세를 잃어버린 가문들도 많이 생겨났다. 이런 근친상간과 그로 인한 유전적 결함으로 몰락한 가문으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가였던 [[압스부르고 왕조]]가 대표적이다.] 우생학은 [[진화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생학적인 사고 방식을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 시초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읽은 다윈의 고종사촌인 인류학자 [[프랜시스 골턴]]이 런던에 상경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노동자들을 조사하면서, 이들이 사는 지역에서 발생한 엄청난 범죄를 보고 이들을 격리하고 그들의 피가 사회에 안 퍼지도록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시작했다.[* 골턴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속된 말로 [[금수저]]였다.] 이같은 주장을 담은 책이 1869년에 나온《Hereditary Genius》이고, 초기에는 찰스 다윈도 진화론의 응용에 대해 편지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점차 골턴의 주장이 극단적이 되고 논란이 됨에 따라 다윈은 우생학과 인간의 선택적 번식에 대한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으며, 사회 및 정치적 의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화와 자연 선택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사용하는 골턴의 주장에 반대와 경고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다윈은 골턴 이후로 진화론이 사회적으로 응용되는 것에 매우 신중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으며, 과학 연구에서 윤리적 고려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다윈의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에는 '''문명화된 인간들은 약자를 제거하는 과정을 최대한 저지하려고 한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다윈의 입장은 결국 그것 때문에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계속 죽이는 경쟁상태에 도달하지 않는 점을 얘기하며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말한다. 생전에 다윈은 [[인종차별]]에 반대한 사람이었다. 다윈 본인은 사회 다윈주의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자기 이론의 사회학적 적용의 가능성을 고려했으나 궁극적으로는 교육이나 주거 환경 등 당장 상관관계가 입증되는 후천적 요인에 더 비중을 두었으며, 무엇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 본능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본능인' [[이타심]]을 해칠 수 있다며 반대하였다. 과학적 방법론과 이에 연관한 사회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이 시대 기준으로는 사실 사회 다윈주의는 상당히 설득력이 큰 이론이었다. 자연선택은 우연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한 다윈과 자연선택을 기다리지 말고 사람이 골라야 한다고 주장한 골턴의 우생학은 생각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윈의 8번째 자식인 레오나드 다윈은 우생학자의 길로 갔다. 골턴이 죽고 나서 우생학 연구학회 회장을 이어받아서 1928년까지 17년이나 있었다. 그리고 골턴은 확실하게 [[http://www.theguardian.com/science/2015/mar/01/racism-science-human-genomes-darwin|인종차별주의자였다.]] 우생학이 하나의 이론적 학문으로서 끝났었다면 괜찮았겠지만, 때마침 그 시대는 열강들이 [[제국주의]]에 물들어 [[식민지]]를 마구 확장하던 시기였다. 식민지 확장에서 원주민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던 열강들은 그나마 인도적인 명분 때문에 이들을 몰살하거나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망설였지만, [[아프리카]]의 [[흑인]]이나 [[인도인]]의 생물학적 연구를 하며 자신들이 [[우월의식|우월한 종족이라는 착각]]에 빠져버려 '''[[선민사상|망설임 없이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리핀 원주민 한 사람을 데려와 전시회에서 [[미싱링크|'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라는 말을 하며 전시하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도 원주민의 귀를 잘라오면 하나당 [[화폐|돈]]을 주는 방법으로 [[남아메리카]]에서도 우생학적 [[제노사이드|인종 대학살]]이 벌어졌다. [[https://naver.me/55yIpUKX|<불의 기억> 2권]]을 보면 우루과이에서 원주민을 둘만 남기고 모조리 죽인 다음은 그 둘을 파리의 인류학 박물관에 넘긴 '실화'가 나온다.[* 사실 이는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 흑인 시종인 앙겔로 졸리만은 죽은 후는 왕의 뜻에 따라 시체가 박제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18세기 후반에 벌어진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