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둔이 (문단 편집) == 상세 == [[국립대만대학]]을 졸업했으며, 잠시 [[중국시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1973년]]에 [[타이베이]]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최연소 시의원 기록을 세웠다. 당시 25세. [[난터우]] 현의원을 거쳐 [[1994년]] [[중화민국 지방공직인원 선거]]에서 [[민주진보당]]의 장쥔슝(張俊雄) 후보를 누르고 [[가오슝]] [[시장(공무원)|시장]]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1998년]]에는 [[셰창팅]] 후보에 0.6%(4천여표)차로 밀려 석패했다. 그 이후 [[2002년]]에 [[입법원|중화민국 입법원]]의 [[국회의원|입법위원]]으로 당선되고 [[마잉주]] [[정권]]에서 행정원장([[국무총리]])까지 올랐다. 그 이후 [[2012년]] [[샤오완창]] 부총통 대신 우둔이가 마잉주의 러닝메이트로 나와서 당선되어 [[대만]] 제13대 [[부통령|부총통]]을 지냈다. [[2010년]]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당시 [[태권도]] 종목에서 문제가 생겨서 [[대만의 아시안 게임 반한 사태|대형 사건]]으로 번졌다. 이 사건 당시 행정원장이던 우둔이가 [[반한]] 발언을 했다.[[http://news.donga.com/3/all/20101120/32734258/1|기사]] 그래서 당시 [[내일신문]]에서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6&aid=0002074586|이런 기사]]도 냈다. 그 후, 2017년 5월 20일. 국민당 주석(당 대표) 선거에서 50% 이상의 득표로 [[훙슈주]] 현 주석을 꺾고 당선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9279326|관련기사]] 3개월 후인 8월 20일에 정식으로 국민당 주석직에 올랐다. 국민당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만 현지 출신, 즉 본성인이라는 점에서, 국민당의 양안정책 노선을 친중 일변도에서 중립적으로 조정할 가능성[* 실제로 우둔이는 대륙이 주장하는 일국양제에 대한 반대 의견을 여러차례 공개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단 1년 후인 2018년으로 예정된 전국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지에 관심이 쏠리는 상황. 2018년 11월 24일의 전국 지방자치 선거에서 국민당이 전국 22개 단체장 가운데 과반인 15개에서 당선되고, 특히 직할시급의 6곳 가운데 절반인 3곳에서 승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는 20년 동안 민진당의 아성이었던 가오슝에서 [[한궈위]] 후보가 당선된 것도 있었다. 정작 우둔이는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201601009|차이잉원 다음으로 비호감 정치인]]으로 꼽혔다. 그러나 이후 중국의 홍콩 탄압으로 대만 내의 반중 인식이 높아져 1년여 후인 2020년 총통 선거에서는 가오슝 돌풍의 주역 한궈위를 내세우고도 패했으며, 우둔이 본인도 국민당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했으나, 13번까지만 당선되면서 입법위원 선거에서 낙선하게 된다. 민주진보당의 입법원 과반의석 저지 또한 실패했기에 당 주석직에서 사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