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 (문단 편집) == 변천 == || [[파일:황룡.jpg|width=100%]] || || [[고구려]] 후기 고분 벽화의 황룡도 || [[상나라]] 시대에는 『용(龍)』이라 불리는 방국이 있었다. 아마 용을 [[토템]]으로 쓰는 나라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절대 다수의 토템은 자연계 중에 실제로 있었던 물건에서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용도 실재했던 동물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는 지금과 기후가 완전 달라서 [[사하라 사막]]도 사막이 아니었고 푸른 초원인 등 여러 가지로 달랐다. 중국 대륙 역시 지금과는 달리 밀림이 대부분이었다. 기후의 변화로 용으로 추정되는 생물을 더이상 기를 수 없게 된 후 이것이 [[환상종]]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도 가능하다. 서주 초기의 [[주역]]에는, 용이 깊은 못에 잠겨 몸을 감출 수 있으며, 하늘을 비약하고, 땅 위에서 서로 싸우며, 흐르는 피는 짙은 황색이라고 묘사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잘 뛰는 능력을 가진 파충류였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는 용은 점차 신화화 되었다. 그 뒤에는 [[화석]]이 용의 영감이 되었다. [[당나라]]의 저작인 감응경에는 >"구름을 모이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산과 언덕에는 모두 용의 뼈가 땅 속 깊은 곳에 혹은 표면 가까이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이, 뿔, 꼬리, 발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큰것은 수십 장이나 되고 어떤 뼈는 열아름이나 되기도 한다. 작은것은 1, 2척 정도에 두께는 3, 4촌 짜리도 있다. 그들은 모두 완전한 몸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나도 일찍이 그들을 채취해 본 적이 있다." 라고 하여 화석에서 용을 연상해 냈음을 밝히고 있다. 용이 비를 내릴 수 있다는 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상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갑골에다가 "들에다가 용의 형상을 만들어 놓으면 비를 내려주시겠습니까?"라고 한 복사가 있는데, 흙으로 용의 형상을 만들어서 비를 비는 의식에 관한 것이다. 서한의 동중서는 춘추번로에서 토룡을 만들고 기우제를 지낼 때 오행학설의 원칙에 근거하여, 계절에 따라 수량과 크기가 다른 토룡을 만들고, 아울러 용을 놓는 방향이나 춤을 추는 사람의 수도 상세하게 정해두었다.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의 [[나가]]/[[용왕]] 개념이 [[한중일]]에 전래되면서 민담에도 자주 나와 익숙한 사해용왕, 사대용왕 등의 개념이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 동북아시아에서 비의 신은 용만 있는 게 아니었는데, 불교의 영향으로 비의 신 하면 일단 용왕을 떠올리는 사고가 퍼졌다. [[단군신화]]의 우사도 용은 아니다. [[산해경]]에는 비를 내리는 신이 사람의 얼굴에 새 몸을 하고 있거나, 사람에 모습과 비슷하지만 몸 곳곳에 뱀을 치렁치러 걸고 있는 모습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단, 후자의 경우 뱀=용 설에 의하면 용신과 관련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적인 존재라곤 해도 불교에서는 용을 수준 높은 축생으로 취급하고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군주]]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황제를 표시하는 용은 발톱이 5개(오조룡) [[왕]]이나 [[황태자]]는 4개다.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에서 태자가 실수로 5조룡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황제]] 앞에 나타나려다 이를 알게된 눈치 빠른 여성이 발톱 하나를 뜯어 내어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황제 외에 5조룡 수 놓은 옷을 입었다는 것은 역모, 황제가 되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원칙이 동아시아에서 제대로 지켜진 것은 아니다. [[조선]], [[일본]], [[베트남]], [[류큐]] 등에서는 3조룡부터 7조룡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 [[파일:suchanggung_eiG53po1Zth7V.jpg|width=100%]] || [[파일:attachment/a0114420_49a66ebc41139.jpg|width=100%]] || ||<-2> [[고려]] 궁성 앞에 배치했던 용조각의 모습. 좌측이 [[수컷]], 우측이 [[암컷]]. || || [[파일:external/www.designdb.com/10_061.jpg|width=100%]] || [[파일:external/img.khan.co.kr/7k03k10b.jpg|width=100%]] || || [[고려]]의 금동장식 용두유물 || 한국의 용 유물들이 실린 사진 || 우리 나라에서는 [[순우리말]]로 '''[[미르]]'''라고 한다. [[만주어]]로는 '무두리, 무뚜리'라고 한다.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는 순우리말로 '미리'라고도 한다. 어원으로는 물을 뜻하는 고어 '믈'이나 '미'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다. 전자의 주장은 우리나라의 '용'이 들어가는 지명은 모두 물가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하지만 대개 우리나라의 지형은 물가를 접하고 있어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용산이라는 지명의 어원은 사실 '믈뫼'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용산이 믈뫼였다는 역사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후자의 주장은 '미나리' '미꾸라지' 등 '미'로 시작하면 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이무기인 미즈치도 물과 관련이 있고 '미'로 시작하기에 상고 일본어와 한국어 간의 관계를 드러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사료를 통한 전문적인 연구가 없기 때문에 아직 단순한 설일 뿐이다. 학계에서는 [[암각화]]나 토기의 뱀을 닮은 파형문이나 몸이 긴 신수무늬를 용을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 중국 [[청동기]]의 원시 용문양도 파형문에 가깝다. [[한국사|역대 한국의 왕조]]에서도 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동명성왕]]이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문무왕]]은 죽으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말을 남겼으며, 이 말에 따라 [[문무대왕릉|문무왕이 죽자 바다에 장사지냈다]]는 [[유언]], 설화가 유명하다. 이 설화에서 문무왕의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겠다"는 말을 들은 승려가 "용은 비록 상서롭지만 그래도 [[짐승]]이거늘, 어째서 그러십니까?"라고 되물었고, 문무왕도 "만약 내가 악한 업보를 받아 짐승으로 태어난다면 이 또한 내 뜻에 맞는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는 당시 신라에서 용 역시 상서로운 동물이기는 해도 역시 업보를 받는 축생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습은 [[고려]] 때에도 이어져 아예 [[태조(고려)|왕건]]을 포함한 왕씨 왕가는 용의 핏줄이라는 [[프로파간다]]가 퍼졌다. 왕건의 [[원창왕후|선조 중 한 명]]이 용왕의 혈통을 잇고 있었다고 기록에 전해져 온다. 자세한 사항은 [[원창왕후]] 항목 참조. 또한 용의 혈통이기에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는 설화도 만들어졌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한국민속상징사전" '용 편'에서는 2천 매의 원고와 3백여 장의 사진을 바탕으로 한국 민속 문화 속에서의 용 개념과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https://folkency.nfm.go.kr/api/file/download/dictionary/361|pdf 파일]] [[인도]]의 [[나가]]가 [[중국]]에 건너갔다는 설도 있으나 애초에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기 훨씬 이전부터 용에 관련된 유물들이 나오는지라 신빙성이 없지만 불교 관련 책들에서는 아직도 종종 나오는 설이다. 다만 나가의 전승들이 불교와 함께 중국에 전승되어 기존의 용 설화와 혼합되고, 익히 아는 용의 이미지에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중국의 고서에서는 용을 묘사하여 [[잉어]]의 비늘, [[뱀]]의 몸, [[사슴]]의 뿔 등을 지녔다 하는데, 이는 (훗날 [[한족]]이란 이름으로 뭉친) 고대의 여러 부족들이 받들던 토템이 하나로 뭉친 결과물이란 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