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사렴 (문단 편집) == 생애 == 요사렴은 557년에 역사가인 [[요찰]]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사렴은 아버지 밑에서 [[한서]](漢書)를 익히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요사렴은 [[진(육조)|진나라]]에서 양주(揚州) 주부(主簿)를 지냈고, 수나라에서는 한왕부(漢王府) 참군(參軍)을 지낸다. 606년에 요사렴의 아버지인 요찰이 세상을 떠나자, 직책에서 물러났다. 당시 요찰은 양서와 진서를 편찬하고 있었지만 이를 이루지 못하였고, 임종할 때 요사렴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양서와 진서의 편찬을 마무리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요사렴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당시 황제였던 [[양제(수)|양제]]에게 양서와 진서의 편찬을 청했고 양제의 윤허를 받아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편찬작업을 계속한다.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직후, 요사렴은 진왕 이세민의 문관 멤버인 진왕 18학사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이세민은 626년 [[현무문의 변]]을 통해 이건성과 이원길을 제거하고 고조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인 [[태종(당)|태종]]이 된다. 요사렴은 태종이 즉위한 뒤 629년에 태종의 조서를 받들어 [[위징]]과 함께 [[양서(역사책)|양서]]와 [[진서(남조역사책)|진서]]를 편찬하였다. 양서와 진서의 편찬 작업에서 위징은 총론을 맡았고, 편찬과 필삭은 요사렴이 맡았다. 요사렴은 양서와 진서를 편찬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직산기상시가 되었고, 이후 직위는 산기상시에 이르렀으며 작위는 풍성현남(豐城康男)이 되었다. 요사렴은 아버지의 유업을 마무리하고 637년에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요사렴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여, 요사렴에게 태상경(太常卿)을 추증하고 강(康)의 시호를 내렸으며, 소릉(昭陵)에 장지를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