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동 (문단 편집) == 유목제국의 단골 중원정복 루트 == || [[파일:49b4ea075df297.jpg|width=100%]] || || 중국 대륙 지형 || 요동 반도와 그 일대는 전략적으로 [[중원]]의 초입이기 때문에 중국은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 세워진 나라들을 위협적으로 인식해왔고, 이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외국과 끊임없이 다퉈왔다. * [[왕검성 전투 |한의 고조선 정벌]] * [[고구려-수 전쟁|수나라의 고구려 정벌]] * [[고구려-당 전쟁|당나라의 고구려 정벌]] - 발해가 다시 요동을 차지하고 거란에게 멸망한 이후부터 명나라 때까지의 기간 동안 갈등이 없었던 건, 거란-여진-몽골로 이어지는 북방 유목민족 또는 수렵채집민족의 전성기라 한족과 한민족 국가가 따로 요동을 가지고 갈등을 벌일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 명나라의 요동 진출, 명나라의 건국 초 조선 견제. 과거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 모두 이 루트로 중원을 침입했고 금나라와 청나라는 중원까지 정복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금나라는 화북 일대를, 청나라는 중원 일대를 넘어 몽골, 위구르, 티베트 일대까지 진출했다. 즉, 요동을 점거하고 있는 세력이 [[산해관]]을 넘기라도 하면 그 이후에는 방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사는 뒤로 갈수록 북경 일대에 수도를 두는 일이 많았다. 요하 일대에서 북경까지의 거리를 보면 중원 왕조 입장에서는 최전선에 수도를 두는 격이다. 때문에 북방민족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항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한민족계 국가와 한판 겨루고 복속시킨 뒤에 출정한다. 이러한 성격의 전쟁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여요전쟁]] - [[고려]]와 [[여진]]을 완전 복속시키지 못하고 중원으로 무리하게 출정한 결과 [[출하점 전투]]를 기점으로 결국 여진족이 금을 세우며 [[요나라|요]]의 후방을 쳐 정복하였다. * [[고려의 여진 정벌]] - 이건 반대로 한민족계 국가가 퉁구스계 민족을 공격한 사례이다. 금나라가 건국하기도 전 일인데도, 건국 이후로 고려를 정벌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조공-책봉 관계는 확실히 맺었다. * [[정묘호란]], [[병자호란]] - 아울러 병자호란의 원인은 단순히 견제 차원이 아니라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성도 있었다.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유목 부대에게 평야는 압도적으로 농경민족에 비해서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지형이다. 참고로 금나라와 청나라의 주류 민족이었던 [[여진족]]은 농경이 주요 생산원이었다. 만주라는 곳 자체가 하나로 묶지만 다양한 식생이 펼쳐진다. 어디는 농사가 되고, 어디는 [[목축]], 어디는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 사는 등 하나로 묶기에는 어폐가 있다. 당연히 [[퉁구스|퉁구스계]], [[동호|동호계]], [[예맥|예맥계]] 모두 만주에 살 때는 이러한 다양한 활동을 보였다. 여기에 유목 부대를 병행하는 엄청난 특이성을 지녔다는 점이 [[여진족]]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이다.[* 후금이 막북을 정복하고 몽골 부족을 통합하여 팔기군으로 흡수한다. 중국의 중앙 관료제와 몽골 여진의 엘리트 유목 부대가 더해지며 막강한 국가로 거듭한다. 중원을 정복하는 여진족의 흡수력과 유연함을 중원을 정복할 수 있던 주요 요인으로 꼽는다.] 위 이미지처럼 [[중원]] 자체가 특히 [[요서]] 지역이 함락된 후 화북으로 들어오면 방어를 하기 어려운 지형이여서 자칫 전투에서 패배하면 수천 km를 내주어야한다. 그나마 거란 상대로는 연운 16주만 내주었지만,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경우 [[정강의 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