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동 (문단 편집) == [[한국사]]와의 관계 == [[한국사]]에서 좁은 의미의 요동을 점령했던 시기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로 고조선은 요하 유역에서 건국한 것으로 추정되며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차지하며 [[요동 공손씨 정권|공손정권]]이 자리잡는데 이때 공손도는 부여와 손을 잡고 선비족과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계속해서 요동으로 진출하였고 이윽고 광개토대왕때 완벽히 점령한 뒤, 멸망 때까지 점유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후계를 자처한 발해가 지속적으로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발해의 요동 영유는 전신인 고구려에 비해 느슨한 형태였는지 몇몇 사학자(주로 외국 학계)들은 발해의 요동, 서북한 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사학계의 통설은 발해가 요동을 느슨하게나마 수복했다는 것이다. 발해 멸망 이후로는 한민족이 장기적으로 요동지역을 점유한 시기는 없다. [[신라]]도 [[나당전쟁]] 때에 일시적으로 진출한 적이 있다. [[고구려]] 멸망 후 신라의 장군 [[설오유]]가 고구려 유민과 합세해 요동에 주둔한 [[당나라]]를 선제공격해 몇 달간 점령했다. 이 사건이 본격적인 [[나당전쟁]]의 시작. 하지만 당나라군의 선봉장 이근행 부대에 패퇴하면서 신라의 요동 수복은 좌절되는데 만약 신라와 고구려부흥군이 당을 요동에서 물리쳤다면 한국사 방향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고려]]도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일시적으로는 요동을 점령했던 적이 있다. 이외에 고려말엔 유익이라는 원의 이 지역의 관리가 명과 고려를 저울질해서 명에게 붙으려다가 요동에 있는 백성들이 이동할 경우 고려 쪽이 더욱 편하고 반발이 적을 것이라 판단해 고려에게 땅을 바치고 귀부를 신청하긴 했는데 당시 고려에서 별로 반응이 없어서 기다리다 지쳐 명에 귀순한 일도 있다. 당시 [[노국공주]]가 죽어 [[공민왕]]은 [[신돈]]에게 반쯤 정치를 일임하고 있던 시기이다. 그래도 이후 [[나하추]]가 명에게 완전히 항복하기 전까진 이 지역은 명, 원, 고려 등의 영향력이 끼쳐졌다. 이후 [[조선]] 대에는 점령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무산되었다. [[태조(조선)|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요동정벌이 무산되고 그 이후로 [[명나라]]가 점령하게 되면서 [[조선]]은 요동을 점령하지 못하게 된다.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주장하는 등의 사태가 있기는 했지만 이후에는 조선이 국시 차원에서 요동에 대한 진출 의지를 표명하지는 않게 된다. 사실 요동을 처음으로 점유한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요동이라는 점과 함께, 후대의 국가인 고구려와 발해도 요동을 차지했다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요동은 한국계 국가들이 옛 땅으로 여길 요소는 충분히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