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나라 (문단 편집) === 발흥 === 거란(契丹)은 [[고막해]]와 함께 [[동호]]계(東胡系)의 [[선비족]] 일파인 [[우문부]]의 후예로서 연원을 따지면 [[위진남북조시대|위 · 진 남북조]] 시기부터 존재한 민족이다. 하지만, 거란은 민족의 규모가 크지 않고 느슨한 형태의 부족 연합 세력이던 탓에 [[유연]]과 [[북위]], [[고구려]], [[돌궐]], [[수나라]], [[당나라]] 같은 주변 강대국들과의 전쟁에 휘말려 부족이 쪼개지고 복속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수나라]]의 공작으로 돌궐이 분열하자, 돌궐에 대한 종속을 그만두고 수에 입조해 예전에 살던 땅을 하사받은 다음, [[고구려]]와 돌궐에 복속한 부족들을 다시 모아 연맹을 구성했다. 이때 세운 연맹은 대하씨(大賀氏)가 주도권을 쥐어서 대하씨 연맹이라고 부른다. 수가 [[양제(수)|양제]]의 폭정으로 쇠퇴하고 [[수당교체기]]의 혼란이 발생하자, 초원의 돌궐은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거란을 비롯한 유목민족들을 복속시켰다. 돌궐에 예속된 상태에서 돌리가한(突利可汗)이 폭정을 일삼자, 이에 위협을 느낀 거란은 당에 귀순하여 보호를 요청하고, 당은 이를 받아들여 돌궐로부터 이들을 지켜주었다. 이후, 당은 거란에 기미제(羈縻制)를 적용하여 대하씨 연맹의 영토에 송막 도독부(松漠 都督府)를 세우고 각 부에는 주(州)를 설치한 뒤, 연맹 수장은 송막 도독(松漠 都督)으로, 부족장들은 각 주의 자사(刺史)로 임명했다. 당의 직접 지배를 받는 독립적인 부족들도 그 수가 무척 많다 보니 당 조정은 별도로 영주 도독부(營州 都督府)와 유주 도독부(幽州 都督府)를 설치해 이들을 관리했다. [[구당서]]에 따르면, 대하씨 연맹은 총 8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고 인구는 200,000명, 병력은 43,000명이다. 각 부는 기본적으로 자치와 독립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만, 전쟁과 외교는 각 부의 합의나 연맹 수장의 명을 따랐다. 그러나 이 또한 수장이 전권을 행사하지는 못해서 연맹에 소속된 8부의 족장인 '대인'들이 다 함께 모여서 전쟁과 외교, 수장 선출과 파면과 같은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군사 업무는 번장(番長)이[* 아관(牙官. 衙官)이라고도 부른다. 요련 연맹 시기에는 이리근(夷離菫)이라 불렀다.] 전담했다. 대하씨 일족 중에서 선출한 연맹의 수장은 일정한 임기 동안 외교, 전쟁을 담당하고 각 부의 관계를 중재했다. 원래 이러한 유목민 연맹의 수장은 부족장들이 능력 있는 자를 선출하는데, 대하씨 연맹은 수장을 대하씨 일족에서만 뽑았으니 선출제에서 세습제로 발전하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하씨 연맹 시기의 거란은 당의 통제에 놓여 있고 최전선에서 돌궐을 상대해야 했지만, 반대급부로 당의 보호를 받는 것은 물론 조공 무역을 통해 부를 누렸다. 연맹 수장과 각 부 대인들은 당 황제가 보내주는 많은 하사품과 관직, 국성(國性)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통치의 정당성까지도 확보할 수 있어서 당과 우호 관계를 맺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를 위해 인질을 보내주거나 당의 군사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수장들은 당 황제가 부족의 통치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거란 연맹이 당을 위해 군대를 파견한 사례로는 고 · 당 전쟁에 거란군이 참여해 당군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을 공격한 일이 있다. 그러나 당 - 거란 관계는 우호와 적대를 오가는 관계였다. 정관(貞觀) 연간까지 당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거란은 [[무주]]의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년)에 영주 도독 [[조문홰]]의 폭정에 분노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진노한 [[측천무후]]는 [[이진충]]과 [[손만영]]의 이름을 이진멸(李盡滅), 손만참(孫萬斬)으로 개명하고 대군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하려 했으나, 거란 반군은 측천무후의 조치에 대해 황장곡(黃麞谷)에서 수만의 주군을 참살하는 것으로 답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대항한 사람이나 역적의 이름을 개명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진충과 손만영의 이름을 개명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성씨도 개명시키던 측천무후가 이진충의 성씨는 갈아치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하의 이원호를 비롯해 국성을 받은 인사들은 반란을 일으키면 바로 국성을 회수당하고 예전의 성씨를 붙여줬는데, 이진충의 조부인 대하굴가(大賀窟哥)가 당에 귀순하면서 받은 당의 국성인 이씨(李氏) 성은 갈아치우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입장에선 전조(前朝)인 당의 국성까지 갈아치울 이유는 없었던 듯하다. 무주군은 거란군의 기만전술에 휘말려 조인사와 장현우, 마인절 몽땅 포로로 잡혔고, 이진충이 이들로 하여금 거짓 첩문을 쓰게 함으로써 연비석과 종회창 모두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한다.] 거란 반군이 막북(漠北)과 요서(遼西)에서 자립하고 하북(河北)까지 휩쓸자, 진압에 어려움을 느낀 주는 급기야 17만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에 더해 돌궐까지[* 주 - 거란 전쟁의 추이를 살펴보던 돌궐 제2제국의 [[묵철가한]]은 거란에게 참패를 거듭하던 주와 교섭하여 하서 지역의 돌궐인들을 돌려받는다는 조건으로 주에 원병을 제공했다.] 끌어들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동협석곡(東峽石谷)에서 손만영의 유인 전술에 걸려 2차 진압군은 궤멸하고 거란 반군은 유주(幽州)까지 진공했다. 이에 주는 재차 20만의 병력을 파병하고 묵철가한이 거란 반군의 후방을 습격해 남북으로 압박했다. 결국, [[이해고]]와 낙무정(駱務整)이 항복하고 손만영은 도주 중에 호위병의 칼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남아 있던 거란의 잔존 세력은 돌궐에 항복했다가 714년(당 현종 개원(開元) 2년)에 이진충의 사촌 동생 이실활(李失活)이 부족을 이끌고 다시 당에 복속했다. 730년(개원 18년)에 거란 연맹의 실력자인 [[가돌우]](可突于)가 이진충의 일족인 소고(邵固)를 죽이고 굴렬(屈列)을 가한으로 옹립하여 대하씨 연맹이 무너지고 요련씨(遙輦氏) 연맹이 들어섰다. 이 시기 거란은 반당파인 가돌우가 당과의 전쟁을 벌이고 내부적으로는 부족 대인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래서 가돌우가 죽고[* [[장수규]]가 이간계로 그를 제거한다.] 요련 연맹의 두 번째 가한인 조오가한(阻午可汗)이 집권한 뒤부터 거란은 당에 귀순해 다시 국성을 받고 화번공주(和蕃公主)와 결혼했다. 평화를 회복한 뒤부터 조오가한은 부족의 재건에 주력했다. 점차 경제력이 회복되고 사회 분화가 촉진되었으며 초보적인 법 제도도 제정했다. 또한 수장의 권한이 강해지고 이리근도 군사 업무와 사법 업무를 겸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 시기에도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다소 복잡했다. 연맹은 당에 귀순하기 전에는 돌궐에 복속하고, 당에 귀순한 뒤에도 마냥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당 현종(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하북 3진의 절도사인 [[안록산]]이 거란과 그 동족인 해족을 계속 침략하자, 거란은 우호의 상징으로 결혼한 당의 화번공주를 주살하고 안록산을 박살낸 뒤, 위구르 제국에 합류했다. 산하 유목민 세력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던 위구르 제국이 쇠퇴하자, 거란은 당의 도움을 받아 위구르 제국에서 파견한 감독관들을 주살하고 다시 당에 사대했다. 위구르의 강력한 통제에서 벗어난 거란은 경제 성장과 세력 확장에 힘쓰고 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돌궐과 위구르 제국은 멸망하고, 위구르를 무너뜨린 [[키르기즈]]는 예니세이로 돌아갔으며[* 키르기즈가 위구르를 멸망시키고 무주공산이 된 몽골 초원을 차지하지 않은 것은 위구르 제국을 무너뜨린 전염병과 기온 하강에 따른 초원의 황폐화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당과 발해(渤海)는 쇠퇴해 초원 지역에서 거란을 막을만한 세력이 없었던 덕분에 거란은 날로 강성해졌다. 거란 요련 연맹은 돌궐과 위구르,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정부의 기초를 세우고 연맹 수장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직조업, 수공업을 장려하고 곳곳에 마을과 유목도성(遊牧都城)을 세웠다. 이러한 국력 강화가 이뤄진 뒤, [[오대십국시대|5대 10국]]의 혼란기에 연맹 수장 자리에 오른 [[야율아보기]]는 상비군을 강화하고 자신의 직할령으로 한성(漢城)을 설치해 군사,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한인 망명자와 포로들이 다수 거주하는 한성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유목민들에게 귀중한 소금과 철을 다량 생산하였다. 이를 토대로 야율아보기는 여전히 연맹의 전통을 유지하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동생 및 친척들과 골육상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거칠 것이 없어진 아보기는 왕조를 개창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옥좌에 앉은 그는 정복 전쟁을 개시해 경쟁 민족인 [[해족]]을 정벌하는 한편, 막북의 [[조복]](阻卜),[* 카마그 몽골과 [[타타르]], [[나이만]], [[케레이트]], [[메르키트]]를 아우르는 몽골 부족들을 이르는 말] 서방의 위구르까지 원정하여 이들 모두를 복속시켰다. 또한 중국으로도 진출하여 하북의 수십 개 주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나, 성공은 여기까지였다. 노용군 절도사(盧龍軍 節度使) 유인공(劉仁恭), 유수광(劉守光) 부자와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지닌 후당(後唐)의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勖)이 태조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인공 부자가 이끄는 노용군은 반측지지(反側之地)의 3대장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여 요군은 모략에 걸려 패하거나, 도리어 노용군에게 요의 경내를 주기적으로 약탈하는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노용군은 유목 경제와 기병 군단이 근본인 요의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침공해올 때마다 목초지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후당의 이존욱은 요군이 여러 차례 침공해 주력군이 패퇴당하자, 요 태조와 직접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존욱과의 일전에서 패배한 태조가 하늘을 향해 "하늘이 아직 나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하진 못하는구나!" 하고 외친 일화는 요의 하북 진출 시도가 대단히 어려웠음을 알려준다. 발해의 경우, 원래 요 왕조와 발해와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발해 선왕대를 기점으로 그 관계가 크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는 대대로 원수였다."는 말을 대놓고 할 정도였으며 태조는 하북과 몽골로 진출하면서도 발해와는 치열하게 싸웠다. 요 왕조의 발해 공세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태조는 대요 전선의 핵심인 요양을 함락해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상당 부분 부숴버렸으며 요양에 대대적인 사민 사업을 벌여 굳히기에 들어갔다. 924년, 발해가 요주를 급습해 자사를 죽이자, 크게 놀란 요 태조는 공격받은 직후부터 발해에 보복성 공세를 전개했다. 이후, 태조는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우회하여 부여부(扶餘府)를 급습해 수일 만에 점령했다. 그리고 방어선이 뚫려 무주공산이 된 발해의 북부 지역을 질주해 상경성을 포위하고 수십 일만에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를 함락,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란국(東丹國)을 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