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나라 (문단 편집) == 종교 == 거란족은 민족 고유의 샤머니즘과 텐그리즘 신앙을 믿어서 하늘, 땅, 태양, 산, 강 등을 모두 숭배하고 중요한 일에는 하늘과 땅의 신들과[* 거란족이 믿는 천신과 지신은 흰말을 탄 남성과 파란 소를 탄 여성의 모습을 한 존재였다.]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거란족은 여러 신들 중에서도 특히 태양을 크게 숭배해서 태양이 뜨는 동쪽을 중요시하고 제사는 모두 동쪽을 향해 지냈다.[* 이를 '제동(祭東)'이라 하며 거란인들은 유르트를 세울 때에도 동향을 향하게 했다. 이는 의례에도 적용되어 중국의 예법에서는 황제가 남면하지만, 요의 황제들은 동향을 향하고 신하들은 남, 북면에 입시했다.] 그리고 흑산(黑山)을 영혼이 돌아가는 곳이라 믿고, 흑산의 산신이 모든 영혼들을 관장한다고 생각해 매년 동지날마다 흑산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사를 지내지 않고는 감히 흑산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거란인들은 지금의 시라무렌 강과 요하가 만나는 백음(白音) 지역에 있는 목엽산(木葉山)을 전설상의 시조인 기수가한의 발상지로 보아 목엽산을 경배하고 흑산과 마찬가지로 매년 제사를 지냈다. 이는 불교를 수용한 뒤에도 마찬가지라서 요의 황제들은 불교 사찰과 불상을 목엽산에 지을지언정, 목엽산에 대한 제사는 항상 충실하게 지냈다. 거란인들은 어렵 활동을 할 때에 처음 잡은 것은 무조건 텐그리를 비롯한 여러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고 제례에는 꼭 백마와 백양, 백조 같은 하얀색의 동물을 제물로 썼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산 속에 안치한 뒤, 3년이 지난 후에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다. 이러한 풍장 문화는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뒤부터 장례를 치른 뒤에 곧바로 매장을 하거나 시신을 수습한 뒤에 화장을 하는 식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거란인들이 인신 공양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순장 문화가 있어 생전 고인과 친분이 깊던 이들이나 배우자, 지원자, 노예들을 함께 묻었다. 사회 항목에 서술했듯이 순장 문화는 정적을 제거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다만, 요의 순장 문화는 순장을 극도로 증오하는 한인, 발해인 유학자들의 강력한 비판과[* 유학의 개조인 공자는 순장을 대체하는 인형인 용조차 극렬하게 비판했으며 유학자들은 공자를 본받아 시대를 막론하고 순장 제도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생명을 중시하는 불교계의 반대가 이어져 점차 사라져갔다. 요가 중앙집권화되고 점점 유 · 불 · 도의 영향력이 강해져 거란인들이 샤머니즘과 텐그리즘을 버리고 불교로 경도되었다는 학설도 있지만, 요는 멸망하는 그날까지 고유의 신앙을 유지해 태무(太巫)를 임명하고 황제의 즉위식과 주요 행사에 꾸준히 텐그리즘 제례를 진행했다. 따라서 불교에 경도되긴 했어도 텐그리즘을 버렸다고 보기는 어렵고 종교 혼합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게 옳을 것으로 파악된다. 거란인들은 건국 이전부터 한인 지식인들을 흡수하고 유학자를 비롯한 종교인들을 포로로 끌고 와 유목도성에 살게 했기 때문에 유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 태조를 비롯한 요의 황제들은 유학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공자에게 존경을 표했다. 건국 초기에 태조는 역사적으로 큰 업적이 있는 사람들을 정해 제사를 지내려 했는데, 태자 야율배가 '''''공자는 대성인으로 만세에 존중받을 사람이니, 마땅히 가장 먼저 해야 한다.''''고 진언해서 태조는 수도 상경에 공자의 사당을 짓고 직접 제사를 지냈다. 심지어 요의 수뇌부 다수가 유학의 도덕 규범을 인재 임용과 도덕 수양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요는 유교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 야율아보기 시절에 역사 기록을 맡은 야율상가도 '사단오륜은 정치와 교육의 근본이고, 육부삼사는 백성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후대의 인물인 야율초재는 『회고일백운』란 시를 쓰면서 '요는 중국의 제도를 존중했다.'는 내용을 적었다.] 한인 지식인, 관료들도 거란인에게 유학을 전파하는데 적극적이라서 성종 초에 추밀사를 지낸 설방이 서경 무일편을, 시독학사 마득신이 당 고조, 태종, 현종의 행적 중 본받을 만한 것을 성종에게 올리기도 했으며 흥종 때는 추밀사 마보충이 불교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진언하고 불교를 비판했다. 그리고 도종은 경연관이 『논어』 <팔일>편에 '이적에게 군주가 있더라도 중국에서 군주가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구절을[* 원문 :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한글 음 : 이적지유군, 불여제하지망야. 해석 : '오랑캐에게 군주가 있더라도, 하가 망한 것만 못하다.'] '이적'인 자신 앞에서 감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북위의 [[최호(북위)|최호]]가 선비족의 역사를 한인의 입장에서 서술했다가 [[태무제]]와 선비족의 분노를 사서 그 일족들까지 주살당한 전례가 있고, 도종처럼 '한화'된 '이민족' 황제 앞에서 이적 운운하는 것은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대의 청 왕조 시절에도 이러한 '사상' 문제 때문에 문자의 옥이 여러 번 일어나 한인 지식인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만큼, 정복 왕조의 황제 앞에서 '이적'을 논하는 것은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과거 [[흉노]]족은 방탕하고 예법이 없어 오랑캐라 불렀지만, 내가 문물을 배워 기품을 갖춘다면 중화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인데, 무얼 거리끼겠는가?''''' 고 말하고, 그 구절을 그대로 해석하라고 명했다. 신료들을 모아놓고 경연을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할 만큼, 도종이 유학에 능통하고 자신감이 넘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요의 황제들은 유교 경전을 배우고 존중했으며 통치에 도움이 되는 점들을 흡수해 국가 운영에 활용하고 유교의 도덕규범을 이용해 인민을 교화했다. 그리고 유교 외에 도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요의 도교는 끌려온 도사들과 한인 도교 신자들이 전파한 것에서 시작한 것으로서 점차 세력을 늘려 상경에는 천장관, 중경에는 통천관이란 도관을 세우고 일부 주와 성에도 도사와 도관들이 많이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또한 일반 백성 뿐만 아니라 일부 거란인 상류층들도 도교를 믿어서 성종은 도교와 불교 모두에 능통했고, 성종의 동생인 야율융유는 동경 유수 시절에 궁관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 도원을 설치해 도사들을 데려올 정도로 아주 독실한 도교 신자였다. 이런 식으로 도교가 세를 얻자, 요의 황제들은 일부 고위 도사들을 고위 승려들과 동등하게 예우하고 관직을 하사하기도 했다.[* 성종이 도사 풍약곡에게 태자중윤 직을 수여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도교의 전파는 도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유행시켜서 요 초기에 도사 유해선이 도교 경전을 저술하고 야율배가 음부경을 번역한 바 있고, 성종대에는 우전 출신의 장문보가 성종에게 내단서를 바쳤다. 추가적으로 도교는 요의 장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쳐서 요대 고분 중 일부에서 도교의 사신도가 그려진 석관이나 화상석, 도교의 영향을 받은 벽화나 부장품,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요의 지배를 받던 여러 유목민들은 거란족과 같이 샤머니즘 신앙과 텐그리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이만, 케레이트, 옹구트 같은 일부 몽골 부족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었다.[* 나이만과 케레이트 같은 유력 몽골 부족들이 기독교를 믿었다는 것이 상당히 뜬금 없이 들릴 수도 있는데, 회창의 폐불령에 타격을 입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북중국과 초원으로 탈출해 몽골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 일부 부족장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당시 몽골 초원에는 상당한 숫자의 기독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산서, 하북 지역에 요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가 발견된 적이 있어서 한인 인구가 많이 사는 지역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밖에도 상경에 회골영이라는 위구르인 거주 구역이 있었던 만큼, 위구르인들이 믿는 [[마니교]]도 요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