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나라 (문단 편집) ==== 상경도와 중경도의 농업 경제 ==== 상경도를 비롯한 초원 지역의 농업은 상술한대로 연맹 국가 시절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거란인들이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대하씨 연맹부터였으며 요련씨 연맹 시절에는 야율아보기의 조부인 균덕실과 숙부 술란이 각각 농사 기술과 직조 기술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야율아보기는 형제들과의 내전을 끝내고 요를 세운 뒤부터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세금을 감면해 농사를 장려했다. 건국 이후에는 북대농올부(北大濃兀部)를 2개 부로 분할하고 오곡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여러 유목민 부들이 이를 본받아 농사 짓는 법을 배웠다, 요 태조는 한인 포로들을 초원 지역에 이주시켜 한인의 선진 기술과 좋은 농작물 품종을 도입하고 토지를 개간했으며 926년에 발해를 무너뜨린 뒤에는 많은 수의 발해인들을 상경 지역에 이주시켜 농업 인구를 늘리고 개발을 가속화했다. 후대의 청 왕조도 그랬지만, 한인과 발해인 포로를 잡아와 정착시킨 것은 기술력이 떨어지는 거란인으로서는 농경에 부적합한 초원을 개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요 왕조가 강제 이주 및 정착을 통해 지역 개발과 기술 흡수라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두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요 태종은 아르군 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 구곤석렬(甌昆石烈)을 정착시키고, 수초가 풍부한 오고의 땅에 구근돌려(毆蓳突呂) · 을사발(乙斯勃) · 온납하랄(溫納何剌)의 3개 석렬을 이주시킨 뒤에 해리하(諧里河)와 케룰렌 강(당대 명칭 : 여구하. 臚胊河) 인근의 토지를 분배해주고 농사를 짓게 했다. 이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목민들에게 농업을 장려한 일이다. 지속적인 농업 장려와 이주 정책을 통해 상경도의 농업 경제가 발달하자, 거란인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반농 · 반목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또한 토지가 비옥하고 수초(水草)가 풍부해 농경과 목축 두 가지 모두에 적합한 상경 지역에 정부의 개발 정책이 더해지면서 상경은 농업이 빠르게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농업과 목축업이 공존하는 농 · 목 복합 지역이 되었다. [[반농반목]]으로 전환하긴 했지만, 해인들 만큼 정주화의 정도가 높지 않은 거란인과 여러 유목민들은 부족 내부에 농경 기술을 가진 이들이 부족이 임시로 정주할 때마다 농사를 짓거나 다른 목초지로 떠날 때, 씨앗을 뿌리고 다시 돌아올 때 수확하는 식으로 농작물을 생산했다. 또한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실위계 부족 중에는 남실위인들처럼 농사를 지는 부족들이 존재했으나, 기후가 너무 춥다보니 수확량은 매우 적었다. 상경도 농업의 발전에는 종교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상경도의 불교 승려들과 사찰들은 동 시기 유럽의 수도원처럼 빈민 구제와 인민 교화 외에도 개간과 농경에 힘쓰고 유목민과 지역 농민들에게 농사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이러한 종교계의 활동은 지역 개발과 상경도의 농업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상경도의 광대한 초원 지역은 두하주와 같은 유목도성과 여러 거점 도시의 정주민들, 일부 유목민들이 농사를 짓거나 국가가 직접 둔전을 운영하고 곡식을 저장했다. 중앙 정부는 둔전을 중심으로 몽골 초원과 서남부 국경 지역에 농업을 일으키고 몽골인들에게 농업 기술을 전수했다. 성종기에 활동한 야율고욱(耶律古昱)의 경우, 지방 장관으로서 둔전을 운영하며 유목민들에게 농경, 식수(植樹), 직조 기술을 전수해주고 지방 행정 항목에 상술했듯이 야율고욱외에도 여러 절도사들이 지역민들에게 농경과 직조, 공예 기술을 가르치고 농업과 양잠을 장려했다. 또한 성종 초에는 위구르 제국이 세운 가돈성의 폐허에 진주(鎭州)를 설치하고 발해 · 여진 · 한인 등의 700여 가구를 진주 · 유주(維州) · 방주(防州) 세 곳에 이주시키는 등, 변경 지역의 개발에도 힘썼다. 성종은 야율당고에게 명해 케룰렌 강과 진주 인근에 둔전을 만들고 서북 지방 수비군에 군량을 공급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상경도에서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으면 군량 운송에 따른 손실과 노동력 소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성종의 명을 받아 서북으로 간 야율당고는 15년 동안 내정에 힘써서 수십만 석의 곡물을 비축하고 군량 공급 문제를 해결했으며 막북 지방에 농업의 기초를 세웠다. 요 왕조가 힘써 개발한 이 지역들은 원대까지도 주요 식량 생산지의 하나였으며 초원 통치의 핵심인 진주에서는 몇 전만 주고도 곡식 한 말을 살 수 있었다. 추가적으로 요가 멸망하기 직전에 야율적렬이 양왕 야율아리를 옹립하고 북요를 세워 서북 지방으로 이주할 때, 북요 정권은 서북 지방의 곡창에 쌓아둔 막대한 양의 곡물을 징발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한인 · 발해인 · 여진인의 이주, 조정의 지역 개발과 둔전 운영, 종교계의 농력 덕분에 상경도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으며 수초가 풍부한 시라무렌 강(당대 명칭 : 황수. 潢水), 아르군 강, 케룰렌 강, 톨 강(당대 명칭 : 토올납하. 土兀拉河, 중국 명칭 : 土拉河) 유역도 농업이 크게 발전하고 생산량이 많이 늘어났다. 다만, 요 말기에는 기온 하강과 사회적 모순 심화,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둔전호가 몰락하고 유민이 늘어나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일부 지역의 둔전을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중경도는 해인들이 많이 살았고, 해인들은 이미 당대부터 일부 세력이 기장과 마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등, 목축과 수렵 외에 농경에도 종사했다. 송대 학자들인 구양수, 송수, 왕증 등은 해인들의 농사 짓는 방식과 기장죽을 먹는 생활 양식, 해인의 수렵 문화와 궁술에 대해 기록했으며 소송, 소철도 시에서 해인이 경작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본래 유목민으로 출발한 해인들이 농사에도 능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중경도의 농업 경제 성장을 견인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죽영 일대가 요에 편입된 이후에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농업에 종사하고, 당과 오대의 국경 지역 주민들의 토지를 소작하던 중경의 해인들 중에서도 소작지를 사들여 어엿한 자작농이 되는 이들도 일부 있었다고 하니 중경도의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력도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해인들은 거란인들보다 더 많이 정주화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송 사신의 기록에 따르면, 거란인들은 이주 생활을 하는 반면에 해인들은 정주화해서 집에서 살고 농경에 능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