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왕내제 (문단 편집) ==== [[고구려]] ==== 중국 측의 기록을 제외하고 봐도 내부적으로 중국의 연호를 빌려쓰거나 사대한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다른 시대와 달리 고구려는 철저하게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겼고, 외부적으로도 대국임을 자처했으며 [[도량형]]과 연호 등 여러 면에서 그러한 흔적이 남아있다.[* 중국 중심의 천하관은 중원을 정점으로 각 지방과 세계가 피라미드 형태로 되어있는 일원적 세계관이지만, 고구려는 중원의 천하와 만주 및 한반도의 천하가 분리된 다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사 관련 주요 학자들은 고구려를 제국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사기]]》도 인용한 북위의 사서 《[[위서(역사책)|위서]]》는 자국 중심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 고구려인이 작성한 〈[[광개토대왕릉비]](414)〉를 보면 고구려는 외부적으로도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쓰여있듯이 [[천자]]를 칭하였고, 독자적인 연호와 천하관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왕]](太王)' 등의 높은 칭호와 '[[영락]](永樂)'을 비롯한 [[연호]]를 쓰고, 신하를 왕이나 제후로 봉하는 등 황제국의 모습을 표방하였다. 건국 초에는 군주호로 부족장을 통칭하는 몇 가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군주의 칭호, 앵커=대한민국)] 그렇지만 중국과의 교류에서는 조공 무역 형태를 띠었는데, 이는 중국 왕조들은 자국 외부의 다른 국가들을 동일한 천자국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왕내제적인 면모도 보이는데, 실제 외교관계에서는 거의 대등한, '''최소한 별개 권역을 관장하는 패권국''' 대우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