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왕내제 (문단 편집) == 내왕외제 == 외왕내제와는 정반대로 국내에서는 왕이지만 대외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꼼수도 있었다. [[대영제국]]은 [[무굴 제국]]을 정복하고, [[인도 제국]]을 만든 뒤 영국 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게 해서 영국 국내에서는 왕이지만 영국 바깥에서는 인도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이런 영국의 꼼수에 필받은 [[이탈리아 왕국]]도 [[에티오피아 제국]]을 점령한 뒤 이탈리아 왕이 [[느구서 너거스트|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하게 해서 역시 이탈리아 안에서는 왕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에티오피아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반면 [[프랑스 제국]],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의 경우 [[황제]][* [[프랑스 제국]] - [[보나파르트가|프랑스인의 황제]], [[독일 제국]] - [[호엔촐레른 가문|독일 황제]], [[러시아 제국]] - [[로마노프 왕조|전러시아의 황제]].]가 존재했기 때문에 외왕내제는 있을 수 있었어도 내왕외제는 없었다.[* [[프랑스]]는 [[중세]] 이래 계속 [[프랑스 왕국|왕국]]을 칭했으나, [[프랑스 혁명|혁명]] 이후 [[브뤼메르 쿠데타|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전쟁|군사력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을 제압하고]] [[프랑스 제1제국|황제를 칭했고]], 그의 [[나폴레옹 3세|조카]] 역시 [[프랑스 제2제국|황제를 칭했다.]] 한편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래 여러 [[왕국]], [[공국]], [[자유도시]] 등이 난립했지만, [[독일 통일|통일]] 이후 [[신성 로마 제국]] 계승을 표방하며 [[카이저|황제]]를 칭했다.] 사실 이런 내왕외제의 원조는 원래 [[공작(작위)|공작]]이 [[왕]]을 칭하는 방식이었다. [[노르망디 공국]]은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 국왕]]을 겸해서 [[프랑스 왕국|프랑스]] 내에서는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지만 프랑스 바깥에서는 잉글랜드 국왕을 칭할 수 있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왕을 칭할수 없었지만 브란덴부르크와 동군연합으로 맺어진 [[프로이센 공국]]은 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 프로이센 공국은 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은 아니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폴란드]] 국왕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약해지자 1656년 벨라우 조약과 1660년 올리바 조약을 거쳐 종주관계를 청산했다. 그것도 모자라 훗날 프로이센은 한때 자신의 상전이었던 [[폴란드 분할|폴란드를 갈라먹었다.]]] 프로이센 공국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시킨 후,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황제의 봉신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지만 제국 바깥에서는 프로이센 국왕으로 행세할 수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이라 왕을 칭할수 없었던 [[사보이아 공국]]도 [[사르데냐 왕국]]을 할양받은 후 사보이아 공작이 사르데냐 국왕을 겸하여 공국 내부에서는 공작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왕을 칭할 수 있었다. 이런 희한한 모습을 보인 것은 [[로마 제국]]과도 연관이 있다. 서로 대응하여 번역되긴 하지만 한자문화권의 황제와 달리 유럽의 황제는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를 의미했다. 유럽 문화권에서는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제국]]과 뭔수를 써서라도 연관이 있음을 밝혀야 했는데 영국이나 이탈리아는 그런 게 없어서 황제로 번역되는 다른 문화권의 [[왕중왕]], [[파디샤]] 칭호를 이용한 것이다. 이탈리아가 의외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애초부터 황제(Imperatore d'italia)가 아닌 왕(Re d'Italia)의 칭호를 사용했다. 1861년 [[토리노]]에서 개최된 이탈리아 왕국의 첫 의회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인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입헌군주정이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왕국]]의 왕실인 [[사보이아 가문]]은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는 [[사부아]] 지방에서 기원하여 [[오도네(사보이아)|오도네 백작]]이 결혼으로 [[피에몬테]]를 상속받은 이래 한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사보이아 가문이 [[이탈리아인]]으로 정체성을 완전히 굳힌 것은 16세기 중후반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의 토리노 [[천도]] 이후였다. 물론 [[로마 제국|로마]]와 연관성이 없다 하더라도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교황]]에게 [[제3의 로마|로마의 후예]]로 인정받으면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을 강제로 합병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이탈리아를 통일]]하여 [[바티칸 포로|교황과의 관계가 험악했기 때문에]], 교황 [[비오 9세]]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국왕과 왕실 뿐만 아니라 [[카밀로 카보우르]] 등 주요 관료들이 죄다 [[파문]]당해버렸다. 여기서 교황을 협박해서 파문을 취소시키고 [[대관식]]을 받을 수도 있지 않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다른 가톨릭 국가들의 압박을 받아 외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 여파로 다른 가톨릭 국가들이 통혼을 꺼렸기 때문에 [[움베르토 1세|맏아들]]을 조카인 마르게리타(동생인 제노바 공작 페르디난도의 딸)와 결혼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겐 [[카롤루스 대제]], [[오토 1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그러한 압박을 떨쳐버릴만큼 막강한 군사력이 없었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집권한 후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탈리아 왕국과 [[비오 12세|교황]]의 화해가 이루어졌으나, 그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보다는 [[두체|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데 중점을 두었기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로마 황제]]로 추대하지 않는 대신 식민지인 [[느구서 너거스트|에티오피아의 황제]]를 겸하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