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왕내제 (문단 편집) ===== 기타 ===== 그리고 조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조선에 조공을 바칠 때 조선의 임금을 가리켜 황제 폐하라 부르기도 했다. 사실 사대 논리에서 책봉을 받은 국가는 원칙상 제후국이므로 스스로 다른 세력들에게 황제국처럼 조공을 받고, 그들로부터 황제 폐하라고 불리우며 독단적으로 책봉을 해주면 안된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여러 [[다이묘]]들과 막부의 [[쇼군]]들에게도 비롯 형식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주었으며 그들로부터 상국(上國), 금상황제(今上皇帝), 폐하(陛下)라고 불리웠다. [[https://sillok.history.go.kr/id/kia_10407026_002|실록1]] [[https://sillok.history.go.kr/id/kia_10408009_002|실록2]] [[https://sillok.history.go.kr/id/kia_10507027_003|실록3]] [[https://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kia_10108024_002|실록4]] [[https://sillok.history.go.kr/id/kga_10907014_002|실록5]] 그렇게 조선 초중기에 [[일본]]에서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나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사실상의 중앙정부였던 [[무로마치 막부]]를 쌩까고 주변국을 향해 [[조공]] 무역을 하던 몇몇 [[다이묘]]들이 이렇게 하기도 했다.[* 이들은 무역 이익을 노리고 [[막부#일본의 막부 / 바쿠후]]의 [[정이대장군|쇼군]]이나, [[조정#朝廷]]의 [[천황]]도 씹고선 [[중국]]의 [[천자]]에게도 칭신하던 자들이니, 이들에게 누가 황제국이고 하는 명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명분상의 이유로 외왕내제를 하지 못하던 터라서 한동안은 주변국들이 이렇게해도 모른 체하거나, 주의를 주는 척만 했다. 어차피 실무적 측면에서는 '나는 천자요'라고만 안 했을 뿐, 할 건 다했지만.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 후기에 주위의 민족을 외부로, 조선을 중앙으로 보는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자 [[영조]] 때 황제 칭호를 쓰자는 상소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이상 모든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발췌.] 고종 시기에 있던 [[갑오개혁]], [[을미개혁]]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제후국 용어인 '전하'라는 호칭을 버리고 황제국 용어인 '폐하'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112017_001|《고종실록》 1894년 12월 17일(기미) 1번째 기사]]] 다만 이 때는 아직 완전한 황제국을 표방한 건 아니라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라는 애매한 호칭을 사용했다. 이후 [[대한제국]]이 개창되면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칭제건원하여 완전한 황제국 체제를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면서 조선 [[태조(조선)|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세운 1392년을 원년으로 삼아 '[[개국]]기원(開國紀元)' 연호를 도입, 1894년을 개국 503년이라 칭했다. 1896년부터는 [[태양력]]을 도입하여 '건양(建陽)'[*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의미.]이라는 연호를 선포하였고, 이듬해(1897)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에 '[[광무]](光武)'로 개원(改元)하였다. 이후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로 다시 개원하였다. 가끔 [[고종(대한제국)|고종]]이나 [[순종(대한제국)|순종]]을 연호를 따 '광무 황제'나 '융희 황제'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외의 사례들로는 아래와 같은 사례들이 있다. * 초기 조선은 명과의 충돌이 심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제3차 요동정벌]]과 태종 시절의 여진족들의 지배권을 둘러싼 명과의 충돌까지, 이러한 모습은 조선이 사대와 국익이 충돌할 경우 국익의 관점을 더 우선시했음을 보여준다.[* 이규철, <조선 태종대 대명의식과 여진 정벌(征伐)>, 《만주연구》17(2014)][* 최용, <비대칭세력연합 이론을 통한 동아시아 외교사의 재해석: 신라-당, 고려-몽골(원), 조선-명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군사학논집》76-2(2020)] * [[경복궁 근정전]]의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두 마리의 목조 용 조각의 발톱은 총 7개인데 당시 한자 문화권의 질서에서 왕세자의 용은 발가락이 3개, 왕(제후)과 황태자는 4개, 황제(천자)는 5개로 규정했다. 따라서 발톱이 7개인 용은 황제보다 높음을 뜻한다. *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칭제건원]]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공식 변경한 뒤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스스로 황제국임을 공표한 것이며 대한(大韓)이라는 국명 자체도 황제국들의 국명인 대명(大明), 대청(大淸) 같은 의미의 국명이었다. 일반적으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국명이 [[고려]], [[조선]] 처럼 두 글자인 나라보다 [[명나라|명]], [[청나라|청]] 처럼 한 글자인 나라가 더 상위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