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왕내제 (문단 편집) ===== 제사 ===== [[종묘]]의 제도로는 천자의 7묘제와 제후의 5묘제가 있는데, 묘호는 천자의 종묘에서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고려 [[성종(고려)|성종]]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5묘제를 택했지만 종묘에 안치된 임금들에게 묘호를 올렸고, 이후 [[의종(고려)|의종]] 때 7묘제로 바꾸면서 완전한 천자의 종묘를 세웠다. 고려는 [[성종(고려)|성종]] 때 유교의 진흥을 위해 왕실에서 [[유교]]적 제사를 장려했는데, 이 중 황제국에서만 지내던 제사인 [[원구단]]을 설치하고 토지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인 방택(方澤)을 실행하였다. 이 중 원구단은 고려 국왕이 하늘의 신 [[상제]](上帝)와 5방제(五方帝)[* 5방신장(五方神將), 5제(五帝)라고도 하며, 동방의 천신으로 봄을 맡은 청제(靑帝), 남방의 천신으로 여름을 맡은 적제(赤帝), 중앙의 천신으로 땅을 맡은 황제(黃帝), 서방의 천신으로 가을을 담당하는 백제(白帝), 북방의 천신으로 겨울을 맡은 흑제(黑帝)를 말한다.], 건국군주 [[태조(고려)|태조 신성왕]](太祖 神聖王)에게 제사 지내는 것으로 그 격이 아주 높은 제사다. 이외에도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불교]]식 행사를 통해 [[하늘]], [[별]], [[용]], [[오악]], 산천의 신에게 제사지냈고, 국왕을 황제와 동일시하였다. 그 뒤 [[여몽전쟁|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고려는 제후국의 체제를 따르기 위해 팔관회를 고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기존 고려의 외왕내제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고려사]]》 〈예지〉에 따르면 [[충렬왕]]이 1275년 11월 14일 본궐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열었는데, 궁전 마당에 설치한 편액에 쓰인 "성수만년(聖壽萬年)"를 "경력천추(慶曆千秋)"라고 고치고 "만세(萬歲)"라 외치던 것을 "천세(千歲)"로 고쳐 외치게 하고 임금이 타는 가마가 가는 길을 황토(黃土)로 포장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또한 "[[대왕|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팔표가 내정하며 천하가 태평하다"와 같은 글자를 바꿨다고 한다. >신하들이 사사로이 왕을 성상(聖上), 황상(皇上)이라 했으며,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나라를 한(漢), 당(唐)으로 표현했다. 왕은 스스로를 짐(朕), 여일인(予一人)[* [[주문왕]]의 자칭.]이라 칭하고, 명령을 조(詔), 제(制)라 하고, 유경내(宥境內)를 '대사천하(大赦天下)'[* 이 '대사천하'라는 표현은 [[고려사]]에서 최대한 과거의 표현을 직서하고자 한 [[세종대왕]]까지도 꺼렸다. 결국 뒤의 천하를 빼버려 직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512029_003|#]]]로 표현했으며, 관부 제도는 모두 천조(天朝)와 같게 했으니, 이들은 너무나도 참람하다. >---- >《동인지문사륙》 〈서문〉 中 고려 말 [[우왕]] 치세인 [[1388년]]에 간행된 서적 《동인지문사륙》에는 고려가 [[충렬왕]] 대에 관제 격하를 당하기 전의 모습이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