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왕내제 (문단 편집) ===== 왕실 예법 ===== "대왕"이나 "태왕" 같은 호칭을 사용하여 대부분의 군주들이 대왕이라고 불렸고, [[법흥왕]]과 [[진흥왕]]이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 당시 자국만의 천하관을 지녔던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서려 하였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539)〉에서는 법흥왕의 왕비 [[보도부인]]을 [[법흥왕|무즉지태왕]]비(另卽知太王妃) 부걸지비(夫乞支妃)라고 하였으며,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568)〉에서는 [[진흥왕]]을 진흥태왕(眞興太王)이라고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 혁거세왕 조'에서 시조인 박혁거세를 가리켜 '[[천자]]'라는 표현이 있고, '삼국유사 남해왕 조'에서 '삼황(三皇)'이라는 표현이 있다. 백제와 같이 왕을 [[폐하]]라고 불렀으며 임금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칭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제2대 [[남해 차차웅]] 때부터 '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이후의 왕들도 모두 '짐'이라는 자칭을 쓴다. 《삼국유사》에는 [[문무왕]]과 [[신문왕]]이 각각 동생과 신하로부터 폐하라는 존칭을 받는다. [[문무왕]]은 《[[삼국유사]]》에서 무령왕과 같이 "붕(崩)"이라는 존칭으로 죽음이 묘사된다. 《[[삼국사기]]》에 있는 [[문성왕]]의 유언에는 [[헌안왕]]을 '선황(先皇)의 영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의 선황(先皇)은 [[원성왕]]으로 추정된다. 〈갈항사석탑기(758)〉에는 [[원성왕]]의 어머니를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로 기록하고 있고, 원성왕 본인을 "경신태왕(敬信太王)"으로 칭하고 있다. 〈개선사석등기(858)〉에는 [[경문왕]]의 왕비 [[문의왕후]]를 '문의황후'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문명왕후]]가 문명황후로 기록되어 있는 등 왕비를 왕후가 아니라 '황후'로 기록한 경우가 종종 보인다.[* 사실 신라의 왕비들은 대부분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드물게 왕후나 황후로 기록된 경우가 발견되긴 하지만.] 〈월광사원랑선사탑비(890)〉를 보면 [[경문왕]]이 재위 시절에 황제와 왕의 복합어인 황왕(皇王)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