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왕내제 (문단 편집) ==== [[신라]] ==== [[법흥왕]] 대부터 [[진덕여왕]] 대까지 1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총 7개의 [[연호]]를 사용했고 이 시기 신라는 [[皇]](황) 또는 [[帝]](제)의 글자를 자주 사용했다. 그 예시로는 [[진흥왕 순수비]]에서 확인된 [[제왕]]('''帝'''王)이란 표현, 진흥왕이 세운 절 [[황룡사]]('''皇'''龍寺), 삼국유사의 [[비형랑]] 설화에서 나오는 [[사(문학)|사]](詞)에서 [[진지왕]]을 '성제(聖'''帝''')'라고 칭한 것, [[진평왕]]의 옥대 성제대(聖'''帝'''帶), [[선덕여왕]]의 칭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선덕여왕이 세운 절 [[분황사]](芬'''皇'''寺) 등이 있다. 또한 고려와 같이 왕의 후계자에게 태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진덕여왕]] 시기 당나라와 [[나당동맹]]을 맺을 때 당나라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여 연호를 폐지하게 된다. [[태종 무열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황제]] [[묘호]]를 올렸다.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묘호는 [[성한왕|시조를 태조로 추숭한 사례]] 외에는 태종 무열왕과 [[열조 원성왕]][* 이 경우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고 [[최치원]]의 〈숭복사 비문〉에서만 발견되기에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덜한 편이다.]밖에 없는데, 이는 태종 무열왕의 묘호가 당나라와의 외교 분쟁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692년 당나라 중종은 신라 [[신문왕]]에게 [[태종 무열왕]]에게 올린 [[태종]]이라는 [[황제]] [[묘호]]를 고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태종 무열왕의 덕과 업적이 크기 때문에 태종의 묘호가 합당하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했고, 당나라는 이후 더 이상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나라 측이 신라가 황제 묘호를 사용하지 말도록 요구한 것이 아니라 [[태종]]이라는 묘호가 당나라에서도 정관의 치로 추앙받는 [[당태종]] [[이세민]]의 묘호와 같았기 때문에 다른 묘호로 고치라고 요구한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 신라가 못 고치겠다고 하자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이 사건 때문에 무열왕의 태종 묘호는 《[[삼국사기]]》에 기록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