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왜구 (문단 편집) === 삼국 시대 === [[한반도]]는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땅이기에 왜구가 한국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신라]] [[박혁거세]] 즉위 8년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유구하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0년]]'''이다(!) 서기 11년 [[남해 차차웅]] 때에도 왜구의 침입 기록이 있는 등 고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음을 알수 있다. 신라 역대 왕들의 [[삼국사기]] 기록을 뒤져보면, 왜구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없는 왕보다 있는 왕이 더 많을 정도. 게다가 신라의 수도 [[경주시]]가 [[동해]] 바다와 그 건너 일본 열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지리적 조건상 일단 상륙을 허용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소지가 컸고, 실제로 왜군에게 수도가 포위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하도 시달리다보니 [[유례 이사금]] 때는 진지하게 왜국 정벌을 논의하기도 했었는데, 실제로 일본측 기록에서는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신라가 일본을 침공한 기록]]들이 자주 나오는 편이다. 결국 왜구의 침략이 절정에 달한 [[내물 마립간]] 때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는 그 대가로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를 떨쳐낼 때까지 몇십 년 동안 고구려의 반속국신세로 떨어지기도 했다.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은 동안에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이고 백제와 왜국이 동맹인데도 왜구는 꾸준히 신라 해안을 노략질했다. [[일본서기]] 기록에는 600년 진평왕 때 신라공격 기록이 있는데 이는 [[향가]]인 [[혜성가]]에서도 알 수 있다.[* '''단''', 혜성가의 진평왕대 왜구 침공도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견해(강고운, 《향가신해독연구》, 한국문화사, 2004)와 [[혜성]]과 함께 연상된 상징적 부연으로 보는 견해(이승남, 「혜성가의 배경적 의미와 문학적 형상화」, 《국어국문학》 123, 1999)가 둘 다 있다.] *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구 침입 기록 >초대 [[혁거세 거서간]] 8년(기원전 50년) -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2대 [[남해 차차웅]] 11년(14년) -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6부의 정병을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4대 [[탈해 이사금]] 17년(73년) -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우오가 전사하였다. >6대 [[지마 이사금]] 10년(121년) - 여름 4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0대 [[내해 이사금]] 13년(205년) -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11대 [[조분 이사금]] 3년(232년) -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직접 나아가 싸웠다. 적이 흩어져 도주하자 정예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 >11대 조분 이사금 4년(233년) - 5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웠다. 그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웠다.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14대 [[유례 이사금]] 4년(287년) - 여름 4월,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1천 명을 잡아 갔다. >14대 유례 이사금 9년(292년) - 여름 6월,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14대 유례 이사금 11년(294년) - 여름에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하였으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했다. >16대 [[흘해 이사금]] 37년(346년) -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한 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생각하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왕이 강세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그들을 격퇴하였다. >17대 [[내물 마립간]] 9년(364년) - 여름 4월,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옷을 입힌 허수아비마다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 아래에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다. 왜인은 자신의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곧장 진격해왔다. 복병들이 갑자기 공격하여 허를 찌르니, 왜인이 대패하여 도주하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17대 내물 마립간 24년(379년) -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가축을 약탈해갔다. 여름 6월에 동쪽 변경을 다시 침범하였다. >17대 내물 마립간 28년(383년) - 여름 4월,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보내 추격하려 하자 측근들이 "병가의 말에 '궁한 도적을 추격하지 말라'하였으니, 왕은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수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독산 동쪽에 이르러 접전하였다. 왕이 이 전투에서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장병이 절반이 넘었다.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적이 여러 겹으로 산을 포위하였다. 이 때 갑자기 어두운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적은 하늘이 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17대 내물 마립간 38년(393년) -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 >18대 [[실성 마립간]] 4년(405년) - 여름 4월,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하였으며, 다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였다. >18대 실성 마립간 6년(407년) - 봄 3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여름 6월에 다시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1백 명을 잡아갔다. >18대 실성 마립간 14년(415년) - 8월,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19대 [[눌지 마립간]] 15년(431년) - 여름 4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명활성을 포위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갔다. >19대 눌지 마립간 24년(440년) -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가축을 약탈해갔다. 여름 6월에 동쪽 변경을 다시 침범하였다. >19대 눌지 마립간 28년(444년)- 왜병이 열흘간 금성을 에워쌓다가 양식이 다하자 물러났다. 왕은 신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싸워 군사와 장수의 반을 잃었다. 말을 버린 눌지왕이 포위되었을 때 홀연히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왜병들은 신령이 돕는다고 생각해 그냥 돌아났다. >20대 자비 마립간 2년(459년) - 여름 4월,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동원하여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이어서 월성을 포위하니,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왕성이 무너지지 않자 적은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군사를 보내 적을 격파하고, 도주하는 적을 바다 어구까지 추격하였다. 적병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20대 [[자비 마립간]] 5년(462년) - 여름 5월,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여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20대 자비 마립간 6년(463년) - 봄 2월,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벌지와 덕지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대승하였다. 왜인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은 변경의 두 곳에 성을 쌓았다. >20대 자비 마립간 19년(467년) - 여름 6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 왕이 장군 덕지를 시켜 그들을 공격토록 하였다. 그는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21대 [[소지 마립간]] 4년(482년) - 5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21대 소지 마립간 8년(486년) -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21대 소지 마립간 19년(497년) -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21대 소지 마립간 22년(500년) - 22년 봄 3월,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https://dogmas.tistory.com/entry/삼국사기-원문-번역|삼국사기 번역문]] 위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며 삼국사기가 아닌 기록에도 수없이 많은 왜구 기록이 등장한다. >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 고구려 봉상왕 4년, 백제 책계왕 10년(진 혜제 원강 5, 295년) 봄. 계림이 왜를 정벌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 왕이, 왜인이 자주 침범하고 백성을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함을 분히 여겨, 백제와 함께 동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에 들어가 칠 것을 도모하니, 서불한(舒弗邯) 홍권(弘權)이 간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험난을 무릅쓰고 원정(遠征)하면 생각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백제는 속임수가 많고 항상 병탄할 욕심을 가지고 있음에리까? 더불어 도모할 수 없습니다.”하니, 왕이 좋은 말로 여겼다. - [[동사강목]] 제 2상(안정복) 유례이사금 때 왜 정벌을 논하는 모습인데, 이때 신라는 진짜 원정을 단행한다. >일본 응신천황 22년(291년?), 신라 군사가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阪:오사카)과의 거리가 백 리였으므로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달라고 애걸하여 백마를 잡아서 맹세하였다. 호원이 크게 군대를 일으켰으나[* 원나라의 일본원정] 겨우 일기도(一岐島:이키 섬)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하였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 여암고(신경준) 이 원정에 대한 기록이 일본에서도 여럿 있다.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 없다. 단지 그 『연대기』를 보면 왜왕 응신 22년, 신라 군사가 명석포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오사카에서 겨우 1백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한 구릉이 있는데 왜인이 이것을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을 애걸하고 군사를 풀어주기를 청하여, 백마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1년에 해당하는데,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이다. 그러나 동사(東史:한국사)에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 해사록(김세렴) >(민달천황) 6년 신축에 경당으로 연호를 고치고 3년 만인 계묘(583년)에 신라군이 서쪽 변방으로 쳐들어 왔다. - 해동제국기(신숙주) [[https://blog.naver.com/yselkr/150038725677|링크]] >일본 [[에도 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 元康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이다. [[일본]]측의 역사서인 '연대기(年代記)'[* ‘임진왜란’이후 ‘제2회 조선통신사‘ 오윤경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이경직(1577)|이경직]]‘이 확인한 일본측의 역사서이다. 서기 1617년 막부(幕府)관리의 소개로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 내의 기록을 보고 현장답사까지 확인 했었다.]와 [[국학(일본)|일본 국학]]의 시조격인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저술한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1688년(겐로쿠 원년)에, 에도시대의 국학자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쓴 역사 연구서이다. 상권 3책·중권 8책·하권 4책으로 되어 있다. 30년간에 걸쳐 중국, 한국의 계 126종류의 서적 중에서, 일본에 관계되는 기사를 뽑아, 의문 제기와 비판 등을 더하여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도 반입되어,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의 권41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편에 내용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서인 [[해동제국기|해동기(海東記)]]와 [[동사강목|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는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왜국의 [[오사카시|오사카(大阪)]]까지 공격 하였으며, 그 이후 [[진평왕]] 시절에도 일본의 서쪽 변방을 공격하였고 또한 [[태종 무열왕]] 시절에는 신라가 일본의 [[대마도]]를 공격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남북국시대인 [[성덕왕]] 시절에 또 다시 현재의 [[미야자키 현]]과 일본의 서쪽 변방을 신라가 718년과 720년에 각각 한 번씩 총 두 차례 공격 하였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에서의 기록은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진평왕]]과 [[태종 무열왕]] 그리고 남북국시대 [[성덕왕]]의 일본 공격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지 않고 있어서 기록상 서로 차이가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이 시기의 왜구는 흔히 생각하는 해적이 아니라 왜 [[사략선|조정에서 파견한 반정규군]]이었다. 14~16세기 왜구의 성격도 정규군에 가까운 성격과 규모로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시기 일본은 군소 국가들이 난립했던 시대[* 적어도 일본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려면 서기 600년대까지는 가야한다. 서기500년 이전만해도 일본열도는 통일국가가없는 군소국가들이 난립한 시대였다.]였고 이 중에서는 백제와 친한 국가, 가야와 친한 국가, 신라와 친한 국가가 다 따로 있었다. 그 중에 왜구가 신라를 침공한 경우는 매우 빈번한데 반해 가야나 백제를 침공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변한 때부터 이들과 교류하며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영락 10년(400년) - 경자에 보병과 기병 오만을 보내 신라를 돕도록 하였다.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로 가득 차 있었다.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물러났고 (...)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즉각 귀순하여 복속하였다. >- 광개토대왕비문 내물왕 때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고 왜와 가야를 격파하는 내용인데 나오는 '뒤를 그히 쫓아 임나가라[* 금관가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즉각 귀순하여 복속하였다.'에서 보이듯이 왜구는 신라를 침공하다가 위급하면 가야로 퇴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금관가야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삼국통일전쟁]] 당시 동맹이였던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적도 많았다. [[삼국통일전쟁]] 때는 백제가 망하자 [[부여풍]]이 이끄는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국력을 쏟아부어 '''1000여 척 전선에 수만명의 대군'''을 보내기도 했지만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궤멸되었다. 한편 신라만큼 아니었지만 [[가야]]도 왜구에 의한 피해를 입을 때도 있었다. 물론 가야는 신라와 달리 왜와 그래도 우호적이었기에 왜구로부터 피해를 받는 일이 적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