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왜구 (문단 편집) == 성격과 구성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geocities.jp/5-2.jpg|width=100%]]}}}|| >賊掠得二三歲女兒, 剃髮剖腹淨洗, 兼奠米酒祭天. 分左右, 張樂羅拜. 祭畢, 掬分其米而食, 飮酒三鍾, 焚其兒, 槍柄忽折. > >왜적은 두세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를 납치해다가 머리를 삭발시키고 배를 갈라 물에 깨끗이 씻은 후 쌀, 술과 함께 제단에 올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좌우편으로 나뉘어 서서 풍악을 울리고 절을 하였다. 제사가 끝난 후에 그 쌀을 두 손으로 움켜쥐어 나눠 먹고 술을 석 잔씩 마신 다음 그 아이를 불에 태우니, 창자루가 꺾어졌다. >---- >《[[고려사]]》 권126, 열전 제39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5%88%97%E5%82%B3&types=o#articleList/kr_126_0010_0050|변안열전]] >절강에 상륙한 일단의 해적들은 젖먹이 아이를 긴 장대 끝에 매달고 펄펄 끓는 물을 끼얹어 어린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르는가 하면, 임신한 여자를 잡으면 그 태아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내기를 걸고 즉석에서 임신부의 배를 갈라내기에서 이긴 자에게 술을 실컷 마시게 하며 흥겨워했다. 그들의 술자리에는 임신부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https://www.yasinmoon.com/news/articleView.html?idxno=30988|#]] 왜구라는 이름대로 초창기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나, 후기 왜구들 중에는 [[왕직]] 등 다수가 [[명나라]] 사람이었고, [[조선인]]이나 [[동남아]] 계통, 심지어는 [[포르투갈인]]도 섞여 있었다. 실록에는 [[사화동]]이라는 조선인이 왜구에 투항하여 [[순왜]]로 활동한 기록이 나오고, 중국 기록인 [[명사(역사책)|명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진짜 왜인은 열 중 셋 정도였고, 그에 따르는 자(중국인)가 일곱이었다. >大抵真倭十之三、從倭者十之七 >---- > 《[[명사(역사책)|명사 일본전]]》 왜구에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 섞인 기간은 고대부터 근세까지 오랜 기간에 걸친 왜구의 활동 중 한시적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이런 후기의 사례를 과장하여 무리한 주장을 했다. 왜구가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이란 주장을 처음 들고 나온 인물은 나카무라 히데다카(1902~1984)이다.[* 나카무라는 1926년 스물넷의 나이에 일본 도쿄제국대(일본사 전공)를 졸업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으로 촉탁이 됐다. 이후 1945년 일본 패전 때까지 무려 19년간 조선사편수회에서 황국사관과 식민사관의 주구(走狗)로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에서 이런 경력을 발판 삼아 일본으로 돌아와 나고야대학과 덴리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저서 ‘일선관계사 연구(1966)’에서 "고려사에 왜구의 소행으로 기록된 것 중 상당수는 왜구를 가장한 고려인 하층민의 반란이었으며, 일본인들이었다 하더라도 대마도나 규슈 해안가 일대 민간인들의 소행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30년 가까이 왜구를 연구해온 이영 방송통신대 일본학 교수에 따르면, 위와 같은 나카무라의 사관은 예단과 비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로 인해 왜곡된 왜구 인식이 확산되었다고 한다. 왜구는 일본의 전국시대에 규슈 일대 중소, 지방 다이묘의 지휘를 받고 움직인 일종의 군사, 사략 집단이었으며, 고려인이나 조선인 또는 민간인이 왜구로 기록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나카무라는 왜구의 실체를 감추기 위해 고려사와 조선사를 교묘하게 취사 선택하여 역사에 기록된 왜구의 상당수가 왜구로 가장한 조선인이라는 학설을 유포했다. 그는 이를 지칭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가왜(假倭)’라는 용어를 썼다.[[https://n.news.naver.com/article/037/0000027547|#]] 실록 등의 가왜는 왜구인 척하며 약탈하는 조선인이었는데 나카무라는 가왜의 사례를 이용해 왜구의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다로 비약시킨 것이다. 이는 야쿠자인 척 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한국인과 야쿠자에 소속돼 범죄를 저지르는 한국인만큼 다른 것이다. 이영 교수는 ‘왜구와 고려·일 본관계사’ 및 ‘황국사관과 고려말 왜구’ 같은 저술을 통해 그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쳤다. 그에 따르면 전후기 왜구는 모두 일본 내란기에 군량미 아니면 전비 확보를 위한 정규군 활동의 일환이었다. 서구적 개념에 따르면 왜구는 자발적인 ‘비공인 해적’으로서 파이러츠(pirates)가 아니라 국가나 종교의 지원 아래 활동한 사략 해적인 코르세어즈(corsairs)였다. 일본의 왕실이 남조와 북조로 나뉜 남북조시대(1333~1392) 남조에 충성했던 규슈 지역 사무라이 세력이 군량미 확보를 위해 원나라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한반도와 중국 산둥성 일대 해안가를 약탈한 것이었다. 고려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급증하고 대규모환 시점이 1350년 이후인데 일본 남조와 북조 간 투쟁이 극심해지는 시점과 일치한다. 또 왜구 침략이 격감한 시점 역시 1392년 남조의 몰락 직후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무려 500척의 함대에 기병 7000까지 대동한 대규모 군사집단을 민간 무력집단으로 호도할 수는 없다. 또한 16세기 활동한 명나라 출신 왕직은 히라도번의 다이묘인 마쓰라 다카노부의 비호를 받았고, 서해는 사쓰마번의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의 용병이나 다름없었다. 다이묘들이 해적질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북조 시대와 전국 시대의 혼란기 속에서 전쟁을 위한 군량미, 자금,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죄 없는 시민을 납치해와서 노예로 쓰거나 재산을 빼앗는 등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마즈]], [[쇼니씨|쇼니]] 가문으로, 시마즈 가문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의 진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류큐 왕국]]([[오키나와]])을 침략, 약탈하여 결국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로 점유한다. 그리고 쇼니 가문은 한반도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혔다.[* 쇼니란 단어는 원래 관직 명이었는데 한 가문이 독점하면서 성씨로 바뀌었다. 쇼니직은 한반도와 교역하는 다자이후에서 군사적 업무를 맞던 직위였다. 그리고 쇼니의 역할중 하나가 [[신라구]]를 소탕하는건데 해적을 소탕해야할 관리가 해적과 협력해서 중앙에 반란을 일으키려다 걸리기도 했으며 나중엔 아예 왜구의 스폰서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