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왜검 (문단 편집) == 왜검을 보는 조선인의 시각 == 조선이 굴욕을 참고 왜검을 배웠다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사실 왜검을 쓰는 것이 굴욕이었다는 것은 '''지금의 한국인의 관점'''[* 그 이유는 당연히 [[일제강점기]].]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 당대에는 일본의 검술이나 일본도를 무기로 쓰는 것에 뭔가 깊은 뜻을 두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까지 내려오는 보물 중에는 [[권응수 장군 유물 장검|조선의 의병장이 왜군으로부터 노획해서 썼다는 일본도]]도 있다.] 단지 부족하니까 진 것이고 부족한 것은 배워서 메꾼다는 국방에 있어서의 지극히 보편적이고 실용적인 발상. 이는 당대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반대로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판옥선]]을 베껴서 시험 건조하거나 조선 통신사가 보여준 [[마상재]] 공연에 영향을 받아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 '조선식 기병전술'을 뜻한다.]을 만들었을 정도이다.[* 검이 지극히 상징적이 된 에도시대 말기에도 사무라이는 기본적으로 군인이었기에 검을 신분의 상징으로 여겼을지언정 신무기 도입엔 적극적이어서 각 번의 군대들은 뛰어난 성능의 서양식 총기로 무장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시대에 검술이나 검은 현대로 따지면 [[총]]이나 [[미사일]] 같은 것과 다를 바 없이 하나의 [[무기]]이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단순한 [[도구]]와 그걸 다루는 기술에 불과했다. 각자 [[AR-15|AR]]과 [[AK]]로 돌격소총의 계보를 만들기 시작한 서구권과 동구권이 시간이 가며 서로의 장점을 가져오는데 딱히 자존심 같은 걸 따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사례로 보아 효과적으로 살상을 할 수 있는 무기라면 적의 것이라도 거리낌 없이 도입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왜검 이외에도 조선의 [[화약]] 무기, [[두정갑]] 같은 갑옷 등의 무기들은 [[고려시대]]에 민족적 굴욕을 안겨다 주었던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하여 크나큰 피해를 주었던 [[조총]] 역시 왜군의 무기라고 해서 배척하지 않고 왜란 중에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왜란 후에는 제식 무기로 삼을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청나라에서 사용해서 병자호란 때 큰 피해를 준 [[홍이포]]를 도입하는데도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왜검 역시 이러한 '무기 도입' 사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오히려 검이나 무기에 민족혼을 담아 운운하는 것은 [[일본]] [[문화]]의 관점에나 가까운 것이다.'''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일본도]]=[[가타나]]를 오직 사무라이에게만 착용하도록 하여 [[사무라이]]의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삼았으며, 그리하여 가타나는 사무라이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근대시대가 끝나 근대시대가 되면서 검이 시대에 뒤떨어진 무기가 되자, 근대 일본에서는 [[무사도]]이니 하는 것을 내세우며 검을 신성화시켰다. 이렇게 검 자체를 신성화한 것은 특유의 애니미즘 사상과 결합한 일본 문화의 특색인 것이다. 그에 반해 성리학적 [[현실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추구하던 조선에서는 무기의 유래에 애니미즘스러운 집착을 가졌다가는 '''[[괴력난신]]''' 추종한다는 비판을 받기 딱 좋았다.[* 유교라고 신을 모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칼 같은 불특정 개체가 아닌 고대 중국신을 비롯해서 농사나 국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를 신으로 모신 것이다. 그밖에 미신이나 해로운 귀신, 원시적 애니미즘적 숭배대상은 모조리 괴력난신 취급이다.] 대신 "어떻게 사용하느냐?"와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에 더 중요한 의미를 두는 실용적인 관점이 강했다. 애초에 딱히 칼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많지 않았을 뿐, 칼을 소지하는 것도 신분적인 상징이 아니었다. 굳이 단순한 무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걸 찾자면 활인데 이것도 활 자체를 신성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사대부의 교양으로 여긴 것이다. [[영국]]에서 신사라면 [[골프]] 좀 칠 줄 알아야 하듯이. 이는 검이나 검술과 관계된 조선의 민담에서도 드러난다. 민담에 따르면 [[부산진 전투]]에서 활약한 첨사 [[정발]]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에서 왜검을 사 왔으며, "난리가 나면 이 검으로 왜인들을 벨 것이다."라고 맹세하고 왜인들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검술에 관한 민담 중에는 한 소년이 항왜로부터 검술을 전수받고, 그 검술로 일본에서 온 달인들과 겨뤄 이겼다는 것도 남아있다. 실제로도 숙종시기 무관중 [[김체건]]이 왜검을 배워오라는 명령을 받고 통신사 행렬에 합류했다가 일본을 돌아다니면서 수행을 하고 돌아와 무예도보통지 집필에 참여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권응수]] 장군 역시 왜군으로부터 일본도를 노획하여 사용하였으며, 이 검은 현재 보물에 지정되었다. [[권응수 장군 유물 장검]] 문서 참고. 조선 사람은 무기나 검술이 단지 도구에 불과한 것이며, 도구를 사용하는 의(義)는 도구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