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왜검 (문단 편집) == 역사 == 단병접전에 능한 왜구의 검술에 학을 뗀 조선은 [[항왜]](降倭)들로부터 그들의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왜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무예제보번역속집에도 실려있고 그 설명이 무예도보통지와 다르게 매우 상세하다는 것을 볼 때 당시에는 역시 활에만 집중한 조선 군인의 검술 실력이 매우 낮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선조실록 기사에 의하면 조선군에 투항한 왜군 네 명이 조선군 군영에서 이루어지던 근접전 훈련을 보고 "'''애들 놀이 같다'''"(有同兒戲)고 평가한 일도 있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를 잘 표현했는데 녹도만호 [[정운]]이 왜병에 맞서려면 [[백병전]] 중심으로 훈련시켜야 한다며 이순신의 [[함포]] 사격 훈련에 이의를 제기하자 이순신이 [[항왜]] 세 명을 백병전을 훈련시킨 정운 휘하의 군사들 앞에 데려다 놓고 "자네가 훈련시킨 군사들이 이들 항왜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면 선상 훈련은 중지하겠다."라고 약조하는데, 결과는 조선군의 완패(...) 이순신이 정운을 향해 엄숙한 얼굴로 "'''자네의 군사들은 모두 전사했다. 정 만호...'''"라고 말하는 부분이 백미. 그 밖에도 무예제보와 같은 임란 이후 편찬된 병서를 보면 '조선팔도에 창하나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자조하고 있었다.] [[정조(조선)|정조]] 시대에 [[김체건]]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왜의 검술을 배워오는데 이는 약간 사서의 의견이 갈린다. 왜관에서 배웠다는 설과 직접 왜국에 건너가서 배워왔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왜인과 직접 접촉해서 검술을 배운 것은 사실이며 그 기예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고 추정된다. 그런 면에서 김체건이라는 인물이 타고난 천재의 기질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검을 배워온 뒤 왕 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그 묘사가 >그가 한번 우러러 고함을 지르자 순간 모인 사람들 모두가 정신을 잃을 뻔했으며 칼을 휘두르는데 칼에 가려 그의 몸이 보이지 않았고 재를 뿌리고 맨발로 그 위를 뛰었는데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라고 한다. 고함을 지른 것은 특유의 기합을 낸 것으로 보이고 칼에 가려 그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검을 빠르게 사방으로 휘두른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번쩍이는 날붙이를 사방으로 교차하며 붕붕 휘두르면 그렇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 예도 24세 중 은망세가 비슷하다.]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는 부분은 일본 무술 특유의 보법인 스리아시, 일명 끄는 발로[* 검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까치발 섰다고 한다.] 추정된다. 스리아시는 발 뒤꿈치가 지면에서 살짝 떨어져서, 앞꿈치와 뒷발의 미는 힘만으로 몸을 운용하기 때문이다.[* 발의 앞꿈치로 몸을 운용하는 것은 신토류, 카게류, 일도류 계열 모두 공통된다. 다만 일도류만 양발의 거리를 매우 좁혀서 움직였다는 특징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발의 뒤꿈치가 땅에 닿은 채로 몸을 운용하면 굉장히 굼뜨게 몸이 운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