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후닝 (문단 편집) == 상세 == 상하이사범대학(현재의 [[화둥사범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상하이시 출판국, 상하이 사회과학원에서 일하다가, [[푸단대학]]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출발해 서양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로 영역을 넓혀갔고, [[로버트 달]], [[레몽 아롱]]의 저서를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984년]]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고, [[1985년]] 푸단대학 최연소 교수로 취임한 후 [[1986년]] 중국 학계에서 처음으로 ‘[[신권위주의]]’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신권위주의는 비서방 후발국가들에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철권통치로 사회를 강하게 통제하면서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권위주의 단계를 거쳐야만 점진적으로 정치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론이다. 1988년부터 이듬해까지 미국에 체류한 후 쓴 저서 <미국 VS 미국(美国反对美国)>에서, ‘미국이 공평한 기회의 땅이며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서구식 민주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기득권 집단이 미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서구의 개인주의와 향락주의, 민주주의는 결국 아시아의 집단주의, 권위주의에 패배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왕후닝의 주장은 [[천안문 6.4 항쟁]]으로 분출한 민주주의 요구에 대한 대응논리를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1995년]] [[쩡칭훙]]의 추천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장에 발탁되었고,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을 거쳐 [[2002년]]에는 주임이 된다.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 주임으로 있으면서 [[장쩌민]]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의 "과학 발전관"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고 알려져 있다. [[2007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로 취임했고,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하면서 [[시진핑]]의 최측근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치국 상무위원 중 유일하게 학자 출신이며 지방행정 경험이 없다. 그러나 중앙정책연구실에서 장쩌민, 후진타오 그리고 시진핑 시대까지 3대에 걸쳐 중국의 통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책사 역할을 한 점에서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2022년]]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20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직에 유임되었고, 2023년 3월 10일 [[전인대]] 전체회의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youtube(m9RRmX9Zvf8)] [[후진타오 강제 퇴장 논란|제20차 당대회 폐막식에서 퇴장]]당하는 후진타오 전 주석을 부축해주거나 혹은 인사하려고 일어나던 [[리잔수]]를 제지한 인물이 왕후닝이다. 제지한 이유는 불명. 두 번 [[이혼]]했으며, 2014년 [[중앙경위국]] 출신인 30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