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평 (문단 편집) ==== 4차 북벌: [[장합]]을 물리치다. ==== >"건흥 9년,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 지켰다." >-『삼국지』 「왕평전」 231년, 왕평은 제갈량의 4차 북벌에 종군한다. [[제갈량]]이 일군을 이끌고 기산을 포위하자 왕평을 남부에 주둔시켰다. 전황에 대해서는 간략한 『삼국지』보다 [[습착치]]의 『한진춘추』에서 더 자세히 묘사한다. 『한진춘추』에 의하면 [[제갈량]]과 [[사마의]]가 상규(上邽) 동쪽에서 조우하지만 지형이 협소하고 험준해서 교전에 이르지 않았다. [[장합]]은 이에 민심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교전을 치뤄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사마의]]는 이를 무시하고 다시 제갈량을 뒤따라서 산에 영채를 세우고 대치를 지속시켰다. [[가허]](賈栩)와 [[위평]](魏平)[* 이 두명은 본래 기산에 포위되어 있던 장수들이다. 진서 선제기 뿐만 아니라 개원점경에도 4차 북벌 때 제갈량이 장군 가씨, 위씨를 포위했다고 나온다.]이 여러차례 제갈량과 싸우기를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이를 한스럽게 여긴 [[사마의]]는 제장들의 출병 요구를 받아들여 장합에게 무당감(無當監) 왕평(王平)[* 『한진춘추』에서는 하평(何平)으로 기술한다.]을 공격하도록 하고 본인은 본대를 이끌고 중도(中道)에서 제갈량과 교전하도록 한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지』 「왕평전」 『한진춘추』 본문과 『한진춘추』의 기록을 참고한 『자치통감』에서는 장합과 왕평과의 교전만 언급하고 결과를 언급하지 않지만 「왕평전」에 의하면 왕평은 [[장합]]의 별동대를 상대로 침착하게 대응하여 방어에 성공했다고 한다. 사마의의 본대 또한 제갈량이 보낸 [[위연]], [[고상]], [[오반]]에 의해 대파당하였으니, 장합의 별동대를 저지한 왕평은 촉한군의 승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포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서 선제기의 기록을 부정하고 한진춘추를 신뢰한다면, 촉한군은 승리를 거듭하다가 이엄의 농간으로 어쩔 수 없이 퇴각한 것인데, 마속이 대패한 와중에 본인 휘하 군대를 지킨 것만으로도 포상을 받았던 왕평이 4차 북벌 때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한 것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정작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4차 북벌을 여러모로 각색한 덕분에 왕평과 장합 간의 교전을 서술하지 않아서 흥세 전투 누락과 더불어 왕평의 저평가에 일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