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평 (문단 편집) ==== 1차 북벌: 마속의 패배를 수습하다. ==== >"건흥(建興) 6년, 참군(參軍) 마속(馬謖)에게 소속되어 선봉(先鋒)이 되었다.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왕평은 계속 마속에게 규간(規諫)하였으나 마속이 이를 쓰지 아니하여 가정(街亭)에서 크게 패하였다." >-『촉서』 「왕평전」 228년, 왕평은 [[제갈량]]의 1차 북벌에 참전하면서 다시 등장한다. 아직 관직이 낮았던 왕평은 참군(參軍) [[마속]]의 부장으로 선봉(先鋒)이 되어 종군한다. 위명제 조예가 장합을 파견하자 [[제갈량]]의 명에 따라 선봉으로서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 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 부적절함)하여 도리어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길 고집하는 악수를 둔다. 이곳은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왕평이 이를 반대하며 계속해서 마속에게 규간(規諫, 옳은 도리(道理)로 간(諫)함)하였으나 마속은 듣지 않았다.[* 왕평이 문맹이라서 마속이 무시했다는 점은 추측에 불과하지 역사서에서 강조하는 점이 아니다. 『속후한서』와 『정사 삼국지』 모두 동일하게 왕평의 간언을 마속이 무시했다는 점만 서술한다.] >"장합의 군대가 도착해 먼저 '보급로를 차단'하자 산 위의 촉군은 식수가 떨어져 거의 탈진상태에 빠졌는데, 이 틈을 노려 장합의 군대가 공격하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제갈량 평전』 위군쪽에서도 이걸 의아하게 생각했는지 장합전에서도 마속이 험난한 지형의 요충지, 아래에 존재하는 성을 점거하지 않고 남산에 (올라) 그곳에 의지해 거기서 막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리고 물을 버린 마속의 악수를 이용해 위의 명장 [[장합]]은 바로 급도(汲道, 물을 길어 나르는 길을 뜻한다)를 끊었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이후 마속군을 대파하는 기록만을 수록하지만 『제갈량 평전』의 저자 여명협은 [[나관중]]의 묘사와 비슷하게 수로를 끊어서 마속군을 탈진시킨 이후에 장합군이 대파했으리라 추측한다. 굳이 급도를 끊었다는 기록을 「장합전」에서 수록한 것을 보면 꽤 타당한 해석이다.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촉서』 「왕평전」 >"(다른) 군사들은 무너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自持]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속후한서』 「왕평전」 마속 휘하의 촉한군은 장합의 일격에 대거 패주하고 총사령관 [[마속]]은 아예 적전 도주한 정황이 「상랑전」에서 발견된다. 결정적으로 [[화양국지]] 유후주지에서는 '제갈량은 참군인 양양출신의 마속, 비장군인 파서출신의 왕평 및 장목, 이성, 황습 등을 선봉으로 하였으나 제갈량의 절도(명령)를 위반하여 장합에게 격파당하였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어 왕평이 하지 말라고 막았던 패배를 부른 마속의 이런 행동들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긴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혼란속에 왕평이 인솔하는 천명의 병사는 장합의 공격에 영향받지 않는 곳에 있었다. 이때 왕평은 1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진채를 세웠는데 왕평이 있던 지역은 장합의 공격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 있어 왕평이 군사를 수습할 수 있었다. 연의에서는 왕평이 마속에게 군사를 이끌고 다른 곳에 진을 치게 해달라고 청해서 5천의 병사를 이끌고 10리 떨어진 곳에 따로 진을 치지만, 정사 기록에는 왕평이 다른 곳에 진을 치게 해달라고 청했다거나 따로 떨어진 곳에 진지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고, 단지 마속군의 다른 진영들이 격파될때 왕평의 거느리고 있던 1천명만이 제자리를 지키며 북을 울리니 장합이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봐 접근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마속군을 격파한 장합에게 왕평 진영의 북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 왕평의 진영은 격파당한 지역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원자에서는 가정에서 제갈량의 전군이 격파될때 몇 리 떨어진 제갈량의 둔영이 이를 구원하지 않고 관병과 접하면서 천천히 행보했다고 설명되는데 실제 제갈량은 가정에 없었으니 몇 리 떨어진 '제갈량의 둔영'은 실제론 왕평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왕평이 장합의 병력과 접했지만 병력을 수습해 천천히 퇴각했다는 왕평전의 기록과 합치된다. 또, 이 설명대로라면 왕평의 진영은 마속이 격파된 지역에서 불과 몇 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높고 이는 장합에게 왕평 진영의 북소리가 들릴 정도였다는 앞의 설명과 합치된다. 또, 제갈량전에 나오듯이 '여러 군대의 집합체'인 마속의 군대는 진영을 남산 여러 군데에 몇 리에 걸쳐 늘여뜨려 세웠을 것이며 이는 왕평전에서 왕평이 흩어진 여러 군영의 병사들을 수습하는 것에서 증명된다. 또한 왕평의 병력 수습으로 보아 왕평이 세운 진영의 행동력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마속군은 각 군영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급도를 하나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며 장합이 다른 곳의 급도를 끊었을때 왕평 진영의 급도는 끊기지 않았기에 행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왕평이 자리를 잡은 진영은 마속이 늘어 세운 군영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장합에게 공격받은 곳에서 떨어져 있고 복병이 의심될 정도로 발견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어서 무사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거기에 마속이 혼란한 군대 운영을 보였지만 왕평의 진영만은 제 자리를 지키며 왕평의 명령에 질서정연하게 따랐다는 점에서 왕평의 진영이 무사했던 것은 왕평이 지휘한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패 이후 주장 마속은 무책임하게 도주하고 다른 부장들도 혼란을 수습하긴커녕 패배하여 흩어지기 바빴을 때 왕평만은 끝까지 부하들인 병사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왕평의 담대함과 강한 책임감을 엿볼 수 있다. >"이에 왕평은 천천히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고 장사(將士)들을 인솔하여 되돌아왔다." >-『촉서』 「왕평전」 어쨌거나 이렇게 왕평이 병사들에게 북을 두드리게 하며 제 자리를 지키자 [[장합]]은 '''복병을 의심해서 접근하지 못한다'''. 장합이 주춤한 사이 왕평은 여러 군영을 수습해서 병사들을 이끌고 퇴각해서 깔끔하게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 위 최고의 명장 중 한명이지만 유독 왕평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장합과 왕평의 첫번째 결전이었다. 가정 전투에서 왕평은 주장 마속보다 나은 식견을 보여주었고 지휘관이 도망가 지휘체계가 붕괴된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홀로 지장 장합을 순간적인 기지로 당황하게 해 1천명만으로 패배로 뿔뿔히 흩어진 병력을 수습해 후퇴하는 성과를 올리는 통솔력과 지략을 보여주었다. 여러모로 가정 전투는 왕평이 가진 장수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준 전투였다. 이 공으로 [[읍참마속|마속이 참수당하고]] 고참 [[제갈량]]과 [[조운]]의 벼슬이 강등당한데다가 그외에도 [[장휴]], [[이성(삼국지)|이성]]을 주벌(誅罰, 죄를 꾸짖고 벌로써 참함.)하고 [[황습]]의 군사를 박탈하는 와중에 오직 왕평만이 승진했다. 참군으로 임명하고 토구장군(討寇將軍) 승진시키고 정후(亭侯)에 봉했으며 더불어 이민족들로 구성된 촉한의 정예부대 무당비군(無當飛軍)[* 남중에서 뽑은 정예병을 편성한 부대.] 오부(五部)를 지휘하게 된다. 왕평의 활약이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이것이 왕평의 잘못으로 판단되었다면 마속이나 다른 부장들, 장병들이 이를 증언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자기들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실제 왕평이 잘못을 했다면 그에 대해서 증언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왕평의 활약 덕분에 후퇴할 수 있었던 장병들이나 마속, 휘하 다른 부장들은 왕평이 잘못했다고 입도 뻥긋 말하지 못했다. 이 말인 즉슨 당시 상황상 마속이나 기타 장수들, 장병들 모두 마속이 잘못했고 왕평이 그 상황에서 불가항력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얘기고, 불과 1천의 병사 가지고 수만의 장합군을 상대로 해서 병사들을 수습해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만약 왕평이 잘못을 했다면 왕평은 이런 상황에서 자기는 귀환하고 다른 장병들을 나몰라라 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그 사람들은 왕평에 대한 증인이 될 사람들이니 사실을 은폐하려면 말이다. 하지만 왕평은 끝까지 책임감있게 병사들을 수습하려고 노력했고 다들 왕평의 공에 대해 말하면 말했지 잘못했다고 증언한 이들은 없어 보인다.] 이 부분은 『삼국지연의』에서도 상당히 자세히 다루는데 덕분에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등 삼국지 창작물에서 가정 전투를 묘사하는 이벤트나 시나리오가 등장하면 왕평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