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평 (문단 편집) === 초기 생애, 촉한으로의 투항. === 어릴 적 고아가 되어 외가인 하(何)씨 집안에 양육되어 한 때는 '하평(何平)'이라고 불렸다가 성인이 되어 다시 왕평으로 개명했다. 이 영향으로 『정사 삼국지』에서도 간혹 하평으로 불린다.[* [[위연]]전에서 하평이라고 언급된다.] >"두호(杜濩)와 부호(朴胡)를 따라 낙양에 이르러 가교위(假校尉)가 되었고 조공(曹公)을 따라 종군하여 한중(漢中)을 정벌하였다가 선주(先主)에게 항복하니 아문장(牙門將), 비장군(裨將軍)에 제배(除拜)하였다." >-『촉서』 「왕평전」 >"9월 파군(巴郡)의 7성(七姓)의 이왕(夷王) 부호(朴胡), 종읍후(賨邑侯) 두호(杜濩)가 파군의 이(夷)족, 종민(賨民- 이민족의 일종)을 들어 내부해왔다." >-『위서』 「무제기」 본래 [[위(삼국시대)|위]]의 무장으로 「왕평전」에 의하면 파서의 이민족 왕 [[두호]](杜濩)와 [[부호(삼국지)|부호]](朴胡)[* 원래는 朴의 발음이 "[[박(성씨)|박]]"이지만, 「무제기」에 기재된 손성의 평론에 따르면 '부(浮)'와 발음이 같다고 한다.]를 따라 낙양에 이르러 가교위(假校尉)가 되었다고 한다. 「왕평전」에서는 두호와 부호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 둘의 항복에 대해 「무제기」에서는 더욱 자세히 밝히며 이 둘이 파서의 이민족 왕으로 기록한다. 유독 이민족과의 인연이 많은 왕평에 대한 첫번째 기록이 이민족을 따라서 위에 항복된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때문에 왕평이 이민족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민족과 어울려 성장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존재한다. 왕평은 [[조조]]를 따라서 [[한중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촉한]]에 투항했다. 정확히 어떤 연유로 항복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서황]]의 부장으로 종군했다 그와의 불화로 투항했다고 서술하지만 이는 창작으로 정사에선 단순히 항복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정사상으론 당시 왕평은 서황 보좌할 급이 아니었다.] 유비는 왕평을 본 후 그를 아문장(牙門將), 비장군(裨將軍)으로 임명했다. 위연, 등지와 마찬가지로 유비가 굉장히 파격적으로 중용한 사람인데 그 둘 보다 더욱 기이하다. 역시 한미한 출신이지만 유비 휘하의 사병이어서 유비가 곁에서 자질과 성품을 관찰할 수 있었던 위연, 방희의 빈객으로 익주에서 유세하고 돌아다닐 기반은 있었던 등지와 달리 왕평은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파서 이민족들과 섞여 살던 출신 불분명한 고아에, 학맥은 고사하고 글도 몰랐고, 과거에 무슨 공적을 세운 것도 아니고, 이민족왕이 조조에게 투항할때 함께한 대가로 겨우 교위벼슬 받은 하급군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보자마자 떡하니 장군에 임명하며 키우려 했고 정확히 또 들어맞았으니 유비의 사람 보는 눈은 비범했다. 이후 [[제갈량의 북벌]]에 참전하기까지 기록이 끊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