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평 (문단 편집) == 평가 == >"__'''왕평은 충성스럽고 엄정했으며'''__ 장억은 식견이 뛰어나고 과단성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자신의 장점에 의지하여 명성을 날리고 자취를 나타낼수 있었던 __'''그들을 필요로 하는 때를 만났기 때문이다.'''__" >-『삼국지』 「장억전」 >"이때 등지(鄧芝)가 동쪽에 있었고 마충(馬忠)이 남쪽에 있었으며 왕평은 북쪽 경계에 있었는데 모두 명성과 치적을 드러냈다." >-『삼국지』 「왕평전」 왕평은 뛰어난 명장으로 제갈량의 북벌 여러차례 종군해 중요한 임무를 맡으며 제갈량을 보좌했으며 제갈량 사후에도 자칫 잘못했으면 더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던 흥세 전투도 수월하게 막아내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사실 왕평은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별개로 특출난 전략안을 보인 적이 없다. 제갈량의 북벌에서도 맡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지 어떻게 전쟁을 수행해야 할지 간언한 적이 없으며 최대 활약인 흥세 전투도 이전에 확립되었던 방어체계에 의거해서 수행했었다. 이는 왕평이 문맹이라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평은 군대에서 잔뼈굵은 인물답게 적재적소로 병력을 운용하는 법을 알았고, 특유의 뚝심으로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다. 가정 전투에서도 대패해서 전군이 패주했음에도 기만전으로 [[장합]]을 속여서 군사를 수습해서 돌아오고, 4차 북벌에서도 장합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기도 했다. 흥세 전투에서의 활약은 평가란에 서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큰 활약을 보였다. 안타까운 점은 왕평은 [[강유]]의 북벌이 제대로 시작된 247-248년 무렵에 죽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249년엔 마충이 사망하고 251년엔 등지가 사망한다.] 뚝심있는 전술가로써 마찬가지로 뛰어난 강유를 보좌할만한 인물이었음을 고려하면 왕평의 죽음은 큰 악재였을 것이다. 실제로 강유는 249년에 [[하후패]]가 투항하기 전까지 [[요화]]를 야전사령관으로 기용했으나 요화는 그리 특출난 지휘관이 아니었다. 256년에 왕평을 승계한 [[호제#s-1]]가 기약을 어겨서 단곡 전투의 대패를 초래했다는 점은 왕평의 부재가 안타까워진다.[* [[유은(삼국지)|유은]], [[왕함]], [[장빈]] 같은 전선 지휘관들 말고 사령관급 인사로 263년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호제, 장익, 요화, [[동궐#s-2]], 그리고 강유 본인인데 사실 나이만 놓고 보면 대장군 강유가 제일 나이가 어리다.[[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m=search&p=1&b=bullpen2&id=5519366|#]]. 그마저도 동궐은 상서령이라 성도에서 정치해야되고 장익은 내부에서 군을 주로 이끌었고 후에 투항한 하후패도 성도에 주둔했고 호제는 독한중이라 한중에 주둔해야 하니 결국 강유가 대장군 녹상서사 영양주자사로 조정에서 가장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위치인 위의 사마가문이나 오의 육손, 제갈각, 정봉와 달리 총사령관 겸 야전사령관 겸 전술지휘관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 능력과는 별개로 성격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진수는 "속이 좁고 의심이 많으며 스스로를 가볍게 여겼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위연처럼 대놓고 적을 만드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구를 사귀기에 좋은 성격도 아닌 것으로, 혹자는 왕평이 자신의 미천한 출신에 콤플렉스를 가졌다고 여기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