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평 (문단 편집) ==== 244년: [[흥세 전투|흥세에서 위군을 저지하다.]] ==== >"남양(南陽)출신의 하안(何晏), 등양(鄧颺), 이승(李勝), 패국(沛國) 출신의 정밀(丁謐), 동평(東平) 출신의 필궤(畢軌)는 모두 명성이 있던 인물로 이무렵 출사했으나 명제는 그들이 부화(浮華-실속없이 화려하고 사치함)하다 하여 쫓아내었다. 그러다 조상이 정권을 잡자 다시 서임되어 조상의 복심(腹心-심복, 측근)이 되었다. 등양 등이 조상의 위명(威名)을 천하에 떨치기 위해 촉을 토벌하도록 권했고 조상이 이에 따랐다. 선왕(宣王)이 이를 제지했으나 막지 못했다. > >정시 5년(244), '''조상이 서쪽으로 장안에 도착해 6-7만의 대군을 일으켜 낙곡(駱谷)을 따라 들어갔다.'''" >-『위서』 「조상전」 244년 봄, [[위(삼국시대)|위]]의 권신 [[조상#s-2|조상]]은 [[등양]] 등의 조언에 따라서 장안에 도착해 대군을 일으키고 촉한을 침공했다. 제장으로는 --[[하후패]]--[* 정황상 당시 정촉호군이었으니 참여했을거라는 강한 심증이 있다. 삼국지집해 [[하후연]]전에 따르면 위략에 나오는 하후패의 선봉 참전은 230년 조진의 원정 때가 맞다. 애초에 그 기사 다음에 정시 연간에 [[하후유]]의 정촉호군을 이어받았다고 나오는데 하후유가 정촉호군을 그만둔 때는 240년 경으로 이 시기 하후유는 정남(征南)장군도독형예주(都督荊豫州)가 되었고, 정시 2년인 241년에는 형주 번성에서 오나라 장군 [[주연(삼국지)|주연]]과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을 244년에 있었던 흥세산 전투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엔 시열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곽회]], [[사마소]] 등을 동원했다.[* 흔히 조상 일파의 뻘짓으로 치부하지만 조상 일파의 일원 [[하후현]]의 인척 [[하후패]]와 사마의 일파의 일원이지만 잔뼈굵은 숙장 [[곽회]]가 참전한 것은 그렇다 쳐도 딱히 높은 관직에 있지도 않고, 딱히 공적이 있지도 않은 [[사마소]]조차도 참전했다는 점은 흥세 전투에 사마의 일파의 지분이 만만찮다는 점을 시사한다.] 촉한에서 이 침공을 파악했을 무렵에 조상의 선봉은 이미 낙곡(駱谷)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힘이 부족한데 적을 막아야 하니, 마땅히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을 굳게 지키고 도적[賊-위나라 군대]들을 만나면 깊이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는 사이에[比爾間] 부현(涪縣)의 군대가 양평관(陽平關)을 족히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촉서』 「왕평전」 장마로 인해 실패한 230년의 [[조진]]의 촉침공 이래로 처음 이뤄진 위의 대침공에 당시 한중에는 3만 내외의 병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중의 장군들은 크게 놀랐다고 한다. 제장들은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낙성(樂城)과 한성(漢城)까지 후퇴, 위군을 내부로 끌어들이되 성에 의존하여 수비를 하면서 부현[* 당시 장완과 강유가 부현에 주둔하고 있었다.](涪縣)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그렇지 않소, 한중(漢中)에서 부현(涪縣)까지 가면 거의[垂] 1천리요. 도적들이 만약 양평관을 얻는다면 곧 화(禍)가 되는 것이오. 이제 의당 유호군(劉護軍)과 두참군(杜參軍)을 먼저 보내어 흥세산(興勢山)을 점거하게 하고 평(平-왕평이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은 뒤에서 막을 터이니 만약 적이 군사를 나누어 황금곡(黃金谷)[* 황금곡은 흥도현에 있는곳으로 황금이라는 가파른 산이 있다. 황금곡은 황금성이 있는데 가파른 언덕에 따라 험하고 꺾인게 칠리이다. [[두우]] 왈: 황금성은 양주 황금현 서북 팔십리에 위치하는데 장로가 이곳을 세웠으며 남으로는 한천에 접하고 북으로는 고도(옛길)를 베고 있어 지형(地形)이 험하고 수비(守備)가 단단함이 극에 이르렀다.(黃金谷在興道縣,山有黃金峭。黃金谷有黃金戍,傍山依峭,險折七里。杜佑曰:黃金戍在洋州黃金縣西北八十里,張魯所築,南接漢川,北枕古道,險固之極), 이상 출처: 자치통감 호삼성 음주.]으로 향하면 평이 1천명을 거느리고 내려가 그들을 맞아 싸우겠소. 이러는 사이에 부현의 군대가 도착할 것이니 이것이 계책의 으뜸이오." >-『촉서』 「왕평전」 그러나 왕평은 이 전략에 반대했다. 부현에서 한중까지 천리나 되며 낙성과 양안관구, 특히 양평관까지 밀렸다가 만일에 양평관이 빼앗길 경우에는 '''화(禍)'''가 되리라 주장했다.[* 두우 왈: 관성은 장로의 성의 속명이다. 서현 서쪽 사십리에 있다. 오호라! 왕후는 중요한 장소에 방비 시설을 하여 나라를 지켰는데 후에 관성이 함락되어 종회가 한중에 이르러 드디어 평정하였다; 왕평이 '도적들이 만약 양평관을 얻는다면 곧 화(禍)가 되는 것이오.'라 하였는데, 말이 영험함이 있었다.(杜佑曰:關城,俗名張魯城,在西縣西四十里。嗚呼!王侯設險以守其國。其後關城失守,鍾會遂平行至漢中;王平謂賊若得關,遂爲深禍,斯言驗矣, 이상 출처: 자치통감 호삼성 음주) 그러나 사실 이들 성은 종회가 촉한 멸망까지 함락시키지 못했고 양안관구도 장서의 배반으로 넘어간 것이니 위 주장들의 논의도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었다. 당시엔 미리 각 요충지에 수비가 보강된 것도 아니고 왕평의 병력은 적었으므로 왕평은 미리 각 길을 막자고 한 것이다.] 이를 염려한 왕평은 소수의 병력이라 할지여도 흥세산(興勢山)으로 대표되는 험한 촉의 산악 지형을 이용해 적을 지연시키고 부현에서 병력이 도착하면 바로 역격하는 전략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유비가 제시했던 한중수비전략[* 위연에서 왕평으로 이어진 수비전략으로, 촘촘하게 배치된 소규모 부대들이 험한 지형에 의지해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면 후방에서 온 지원군이 이를 요격하고 그 사이에 수비군이 퇴로를 차단하는 방식.]으었는데 훗날 [[강유]]는 적을 평지로 유인하는 방식으로 바꿔버렸다.[* 강유가 공세적으로 수정한 방식이 바로 한중의 요충지 한성과 낙성, 관성(양안관구)까지 후퇴하는 방식으로서, 왕평의 고지대 방어전략은 방어라는 점에서는 완벽했지만 고지대에서 진을 치고 있을 경우 적이 물러갈 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힐 수 없다. 흥세 전투에서야 위군이 전멸했지만 그건 조상과 하후현 등의 수뇌부가 승리를 거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간만 끌다가 비의가 이끈 지원군에 퇴로가 차단당해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것이었다.(다만 강유는 한중 전략 수정 당시 과거의 전략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말한 바(然適可禦敵,不獲大利。), 한진춘추에 나오는 것처럼 조위가 입은 피해가 관중이 텅텅 빌 정도였는지는 의문이 있다.) 그러나 강유는 국력이 위에 현저히 밀리는 상황에서 흥세 전투와 같은 심각한 타격을 한 번만 더 입히면 총력전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고, 그 결론이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한중의 물자, 식량, 병력을 요충지에 집결시키고 위군을 한중의 평야로 유인해 방어를 하다가, 현지에서 조달 가능한 곡식이 없고 먼 곳에서 군량을 운반해오느라 피로해진 위군이 후퇴 시 (강유가 이끄는)유격군과 각 요충지의 병력들이 위군을 협격해 큰 타격을 입히는 계획이었다.] 제장들은 왕평의 주장을 의심했지만 오직 [[유민(삼국지)|유민]]만이 왕평의 전략이 옳음을 깨닫고 왕평과 작전을 시행했다. >"드디어 자기가 거느리는 군사를 인솔하여 흥세를 점거하고는 기치(旗幟)[* 예전에 군대에서 쓰는 깃발을 말한다.]를 많이 벌려놓으니 100여리를 걸쳐져 있었다." >-『자치통감』 74권 유민과 왕평은 흥세를 점거해서 100리의 길이의 전선에 깃발을 꽂아서 수를 부풀리는 계략을 썼다고 한다. 이 계략이 과연 성공했는지 알리는 기록이 없지만 왕평이 주장한 지연전은 성공해서 위군은 흥세를 뚫지 못했다. 지지부진해진 조상군은 제대로 된 결전을 치루지 못했음에도 심각한 물자부족에 시달렸으며 원정의 험난함의 영향으로 소, 말, 노새 등이 죄다 죽었다고 한다. 당시 그나마 선방하던 위의 [[곽회]]도 「곽회전」에 의하면 형세가 불리하자 즉시 적지로부터 탈출했기 때문에 크게 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공세를 중단하고 제빨리 퇴각한 덕분에 선방한 것인데, 이는 조상의 공세가 얼마나 난항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장군 조상(曹爽)이 촉을 정벌하던 때 정촉장군(征蜀將軍)이 되어 하후현(夏侯玄)의 부장으로 낙곡(駱谷)에서 출병하여 흥세(興勢)에 주둔했다. 촉의 장군 왕림(王林)은 밤에 군영을 기습했는데 사마소는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진서』 「[[사마소|문제본기]]」 당시 [[하후현]]의 부장으로 종군하던 [[사마소]]는 [[왕림]]이라는 장군의 습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림(林)은 사실 평(平)의 오기로 실은 왕평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실제로 왕평은 당시 지연전을 수행해 소규모의 병력으로 치고 빠지는 식으로 위군을 흔들려 했으니 왕평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마소를 공격했더라도 개연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부현에서 출발한 --[[강유]]와--[* 정황상 대사마 장완의 사마였던 강유도 참전했을 가능성은 높은데 기록이 없다.] [[비의]]의 원군이 도착하자 공세로 전환해서 조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공을 세운다. 촉한이 위를 상대로 거둔 가장 큰 승리 중 하나를 지휘한 주인공이나 흥세 전투는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이때 등지(鄧芝)가 동쪽에 있었고 마충(馬忠)이 남쪽에 있었으며 왕평은 북쪽 경계에 있었는데 모두 명성과 치적을 드러냈다." >-『촉서』 「왕평전」 촉한 북부를 지키는 명장으로써 동부의 [[등지]]와 남부의 [[마충]]과 함께 칭송받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