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왕충후이 (문단 편집) === 중화민국 외교부장 === 1937년 중화민국 국민정부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서안 사건]]으로 장제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4월부터 5월까지 한달간 [[행정원장]] 대행을 지내기도 했다. 7월에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기찰정무위원장 [[쑹저위안]]의 독자 협상을 비판하며 쑹저위안이 체결한 모든 협정은 중앙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무효로 천명했다. 이후 [[트라우트만 공작]] 과정에서 일본외상 [[히로타 고키]]와 협상하였으나 일본 측이 터무니 없는 요구를 강요하여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1938년 1월,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1938년, 하노이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왕징웨이 공작]]의 결과로 [[왕징웨이]]가 베트남으로 도주하자 [[장제스]]의 지시를 받고 왕징웨이를 설득하여 충칭으로 복귀시키고자 했지만 왕징웨이는 이를 무시하고 난징으로 가서 [[왕징웨이 정권]]의 수장이 되었다. 1938년 3월 29일부터 4월 1일까지 충칭에서 개최된 임시전국대표대회에서 외교보고를 맡았다. 이후 국방최고위원회 비서청장에 임명되었다. 1942년 7월 조직된 전문소위원회에서 [[주자화]], [[우톄청]], [[천궈푸]], [[허잉친]], [[다이지타오]]와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어 한국 독립 문제를 담당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섭했다. 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에 장제스의 비서장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며 회담 선언의 문구 작성을 맡았다. 이때 [[윈스턴 처칠]], [[루이 마운트배튼]] 등과 회견했다. 장제스와 함께 한국의 독립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