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문단 편집) === 혁명의 영웅에서 [[한간|민족의 반역자로]] === ||<-7>{{{#!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wii greater east asia confedence.jpg|width=100%]]}}}|| || [[바모]] || [[장징후이]] || '''왕징웨이''' || '''[[도조 히데키]]''' || [[완 와이타야콘]] || [[호세 P. 라우렐]] || [[찬드라 보스]] || || [[버마국]] [[수상]] || [[만주국]] [[수상]] || '''[[왕징웨이 정권]] [[주석(직위)|주석]]''' || '''[[일본 제국]] [[일본 내각총리대신|수상]]''' || [[태국]] [[왕자]] || [[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통령]] || [[자유 인도 임시정부]] [[주석(직위)|주석]]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JqfPEUujqWk,start=152)]}}}|| || 1943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회의에서 연설하는 왕징웨이 || >"형은 쉬운 길을 가십시오. 동생은 어려운 길을 가겠습니다."[* 장제스가 네 살 어리지만, 중국에서는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존중의 의미로 형이란 표현을 썼다. 예컨대 장제스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장쉐량]]을 한경(장쉐량의 자)형으로 부르곤 했다. 한국에서도 성인 남성들 사이에서 '김형', '이형' 하는 식으로 서로를 호칭하기도 하였는데 최근에는 보기 어렵다. 90년대까지 소설 등에서는 볼 수 있는 표현이었지만 이미 사회에서는 죽은 지 한참 된 표현이 되어있었다.] >---- >충칭을 탈출하기 직전, 장제스에게 남긴 편지의 말미. 그러던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왕징웨이는 '''저조구락부'''[* 큰 소리를 내며 항일을 주장하는 항전파들에 반대해, 작은 소리로 화평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중일평화, 반공 성향과 함께 반장제스 성격도 있었다. 그러나 이 단체를 왕징웨이가 조직한 것은 아니다. 저조구락부는 [[루거우차오 사건]] 직후부터 생겼으며 가오쭝우, 메이쓰핑과 같은 왕징웨이의 측근들도 있었으나 [[타오시성]], [[후스]] 등 학계 인물, 심지어 [[천부레이]], [[저우포하이]] 등 장제스 측근들도 있었다. 이들은 국민당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왕징웨이가 자신들의 생각과 비슷하자 그를 중심으로 삼았다고 한다.]라는 단체에 합류해 줄곧 대일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트라우트만 공작]] 실패 직후인 일본 제국이 제1차 고노에 성명으로 중국 정부를 교섭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국민정부를 말살하겠다)며 소통 창구를 닫아버리자 장제스와 함께 '''예문연구회'''[* 국민당 중앙선전부(부장 [[저우포하이]]) 휘하에서 문화단체를 가장하여 1938년 1월 중순 한커우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창사, 청두, 광저우, 충칭, 시안, 홍콩에 분회를 두며 화평파의 또다른 거점이 되었다. 장제스의 자금 지원, 왕징웨이의 지도, 가오쭝우의 주도로 운영되었으며 일본과의 화평과 반공을 기치로 내세웠다.]를 만들어 일본과의 접촉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난징 함락 이후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던 우한마저 함락되자 왕징웨이는 더 이상의 항전이 무의미한 걸 넘어 항전하는 것이 중국을 죽이는 길로 판단하였고[* 왕징웨이 자신은 광저우가 함락되고 창사가 성급한 [[초공작전]]으로 불바다가 되어버린 1938년 10월 최종 결심을 했다고 말하였다.] [[왕징웨이 공작|일본과의 비밀협상]] 끝에 [[1938년]] [[12월 18일]], 장제스에게 청두로 강연을 하러 간다는 핑계로 [[충칭]]을 탈출하여 [[청두]], [[쿤밍]]을 거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하노이]]로 건너갔다.[*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쿤밍에 도착했을 때 이 사실을 알았는데, 바로 운남성 주석 [[룽윈]]이 장제스에게 '''"왕징웨이가 다짜고짜 쿤밍에 찾아와 일본과의 화평 운운하며 협조를 요구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았기 때문. 당시 전선 시찰을 위해 [[시안]]에 나가 있었던 장제스는 충격을 받고 곧장 충칭으로 돌아왔으며 룽윈에게는 왕징웨이에게 절대 협조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그 곳에서 중일 평화회담을 주장하는 [[https://blog.naver.com/harry726/222822280175|<염전(艶電)>]][* 1938년 12월 29일에 발표되었다. '염(艶)'은 중국에서 29일을 뜻하는 말로, 즉 '염전'은 '29일의 통전'이라는 의미이다.]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없었던 국가적 위기에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공산당과의 합작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자 떠나 당과 국가를 돌보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혁명당원이 할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비통하고 안타깝다. 오로지 자성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란다." >---- >12월 21일, [[윈난성]]장 [[룽윈]]에게서 왕징웨이의 탈출 소식을 들은 후, 장제스의 일기.[* 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이때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중국을 떠난 이유를 단순히 국공합작에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왕징웨이가 하노이로 달아난 다음 이런 항일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자 국민정부는 그의 변절을 의심했고 왕징웨이에게는 국민정부 [[남의사]]의 수장 [[다이리]]가 보낸 암살단이 찾아왔다. 왕징웨이도 이런 일을 예상했던 것인지 컬럼비아 가의 3층 고급 빌라에 거주하며 외부인과의 만남을 최소화하고 있었는데, 왕징웨이 암살단은 미남계를 사용해 왕징웨이의 빌라에서 일하는 베트남 여성을 포섭하여 왕징웨이의 생활 습관, 빌라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매일 아침마다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빵집의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였는데, 암살단은 이것을 이용해 배달부를 매수하여 빵에 독을 탔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그날따라 빵 대신 과일로 아침을 해결하여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어느 날에는 빌라 화장실 수도관에서 물이 새자 암살단은 욕실 수리기사를 납치해버리고 대신 빌라의 화장실로 들어가 독가스 캔을 욕조 밑에 설치했으나, 이번에는 경호원이 화장실에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1939년 3월 20일 왕징웨이가 하노이 교외로 유람을 떠나자 암살단은 중간 지점에 매복해 왕징웨이를 기다렸지만 경찰의 경호가 삼엄해 다시 한번 실패하였다. 연이은 실패에 국민정부는 암살단을 닦달했고, 성급해진 암살단은 바로 다음날인 3월 21일 새벽, [[수류탄]], 경[[기관총]], [[도끼]]로 무장하고 빌라의 담을 넘어 직접 빌라를 공격하였다. 훈련받은 자객들은 경호원들을 손쉽게 처리한 다음 2층 4호실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잠옷 바람의 여성과 침대 아래서 무언가를 쓰는 남성을 발견했고, 그들을 암살했으나 그들은 왕징웨이 부부가 아니라 왕징웨이의 심복인 쩡중밍(曾仲鳴) 부부였다. 쩡중밍은 왕징웨이의 안전을 위해 매일 밤 왕징웨이와 침실을 바꾸며 잤는데, 당시 모든 자금을 관리하던 쩡중밍은 침실에서 수표에 서명을 하다 암살당한 것. 어쨌거나 그 덕에 왕징웨이는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쩡중밍은 사망했으나 부인인 방군벽(方君璧, 1898~1986)은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다음에도 3번의 추가 암살 시도가 있었고, 왕징웨이는 총 일곱 번의 암살 위기를 넘겨야 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확실한 매국행위를 한 적이 없음에도[* 상술한 <염전>은 1938년 12월 22일 발표된 제3차 고노에 성명에 호응한 글로, 고노에 성명으로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고 국가의 생존과 독립이 항전의 목표라면 그 목표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글이었다.] 무력까지 사용한 국민정부에 왕징웨이는 경악하였고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관계도 끝장났다. >"내가 충칭에 있을 때, 국민당 부총재, 국방최고회외 부주석으로 이 기관과 함께 옮겨 다녀도 안전에는 별 문제가 없었고 (중략) 패전하여 죽더라도 사후에 이름을 얻을 터인데, (이런 내가) 왜 충칭을 떠났을까? 나는 20살 조금 넘어 혁명에 투신한 이후로 한 번도 나 자신을 위한 계산을 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지금은 이미 50여 세가 되어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망하는 것을 목전에 두고 있다." >---- >하노이의 아지트가 습격당한 직후인 3월 30일, 왕징웨이가 발표한 글인 <覆華僑某君書> 中.[* 얼핏 보면 왕징웨이가 스스로 충칭을 떠난 것을 후회하는 듯한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나는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충칭을 떠난 것이 아니며, 화평을 추구하는 길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불명예와 죽음까지 무릅쓰고 충칭을 떠난 것이다"라는 자기희생을 강조한 내용이다.] 결국 1939년 5월 8일, 당시 일본이 점령 중이던 [[상하이]]로 가 [[저우포하이]], [[천궁보]], 리스췬 등과 함께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여 정부주석 대리[* 명목상 정부주석은 기존의 주석이었던 [[린썬]]이었다. 왕징웨이는 린썬에게 충칭에서 난징으로 와서 주석에 복귀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린썬은 당연히 이딴 괴뢰정부 따위는 씹었다.] 겸 행정원장에 오른다.[* 이 과정과 왕징웨이의 선택을 찬양한 밀도 있는 르포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발표되었다. 그 르포를 쓴 사람은 바로 [[박태원(소설가)|박태원]]이었다. [[월북]]을 했기 때문에 이런 친일 수필은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한편 정부를 수립하기 직전, 왕징웨이는 화평을 통한 구국의 의지를 재확인했다. >我們今日要為救國而死,不要只為殉國而死! >우리는 오늘 구국을 위해 죽을 것이지, 순국만을 위해 죽지 말아야 한다! >---- >1939년 12월 29일 왕징웨이가 발표한 <艷電書後> 中.[* [[https://twitter.com/wjwchina/status/1533101593750556675|#]]. 왕징웨이는 승산이 없는 중일전쟁에서 무의미하게 희생되어 [[순국]]하는 병사들 대신, 일본과 화평을 맺어 희생을 막고 나라를 구하는([[구국]]) 선택을 뜻하는 듯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C5lTlX692CU)]}}}|| || 일본을 방문한 왕징웨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facinghistory.org/3.13_Jingwei.jpg|width=100%]]}}}|| || [[도조 히데키]]와 회동하는 왕징웨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왕징웨이 정권 취임식에서 맹세를 낭독하는 왕징웨이.jpg|width=100%]]}}}|| || 왕징웨이 정권 취임식에서 맹세를 낭독하는 왕징웨이 || 그의 <염전>과 더불어 이런 왕징웨이의 행보에 중화민국은 당연히 왕징웨이가 조국을 배반했다고 판단하였고, 1938년 6월 8일 왕징웨이의 체포를 수배하는 것에 이어 결국 1939년 1월 1일, 국민당 임시 중앙 상무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왕징웨이를 모든 공직에서 해임시키고 국민당에서 영구 제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어리석음과 천박함이 그 정도까지 추락할 줄을 미처 몰랐다. 그처럼 파렴치하고 퇴폐적인 인물을 가진 것은 당과 국가의 불행이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명망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자신의 선택에 동조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장제스에 적대적인 군벌들조차 왕징웨이를 무시했다.[* [[우페이푸]], [[돤치루이]], [[차오쿤]]의 경우 일본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고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은 일본과 싸웠다. 중요한 건 이 6명 모두 장제스와 사이가 안 좋거나 안 좋은 적이 있었고 [[돤치루이]]의 경우 한때 일본의 지원까지 받았던 군벌이었다. 일본이 포섭할 수 있었던 인물은 기껏해야 재정부장이나 외교차장 정도를 지낸 잔챙이들 정도였다.] 일본은 왕징웨이를 내세워서 장제스 정부를 무너뜨리고 왕징웨이와 협상하여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화친파를 일소시켜 장제스 정권의 정통성만 굳건히 만들어 준 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왕징웨이와 같이 합류했던 가오쭝우 등 일부 인사들이 일본이 자신들을 괴뢰로 내세워 이용하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하여 홍콩으로 탈출해서 왕징웨이와의 일본의 협정을 공개하며 그의 비겁함을 규탄함으로 왕징웨이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39년 반(反)왕징웨이 포스터.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왕징웨이의 사망 당시 포스터.jpg|width=100%]]}}}|| || 1939년 반(反)왕징웨이 포스터[* 왕징웨이는 화평구국(和平救國)이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으나, 거울 속에 비친 왕징웨이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고 매국밀약(賣國密約)이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명목과 실상이 전혀 다른 왕징웨이 정권의 이중성을 질타하는 의미이다.] || 왕징웨이의 사망 당시 중화민국 측 포스터.[br]당시 중국 입장에서 왕징웨이가 얼마나 경멸의 대상이었는지 알 수 있다. || 그가 일본군과 화친하려고 한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을 배반했다는 민족배반론(한간론), 충동적인 성격으로 판단을 그르쳤다는 실수론,[* 실제로 <염전> 발표 직후 왕징웨이는 많이 불안했는지 하노이에서 가오쭝우를 만나 일본을 믿을 수 있는지 여러 차례 물었다. 가오쭝우는 "일본인이 말하는 것은 40%만 믿을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일본의 무자비한 침략으로 민중들이 고통받는 것을 볼 수 없었다는 고육지책(자기희생)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자기희생론 등이 주어진다. 이 중 단순히 어느 한쪽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려우며 왕징웨이가 여러 번의 권력투쟁과 냉혹한 국제정세로 인하여 좌절하게 되면서 그의 민족주의가 변질되게 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대개 비판론이든 희생론이든 각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반영하며 실수론은 비판론이나 희생론에서도 상당히 인용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40년 11월 30일 왕징웨이와 짱스이.jpg|width=100%]]}}}|| || 1940년 11월 30일, 주중 만주국 대사 [[짱스이]]와 대화를 나누는 왕징웨이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