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문단 편집) === [[국민혁명]]과 [[반장전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우한 국민정부)] 이후 국민당은 장제스의 주도 아래에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개시하였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당권과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우한]], [[난창]],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를 잇달아 점령했다. 이에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던 왕징웨이를 추대하여 장제스를 견제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영왕운동]]이다. 이에 따라 왕징웨이는 1927년 4월 1일에 중국으로 귀국하였는데 이때 장제스는 왕징웨이에게 힘을 합쳐 [[국공합작]]을 끝내고 공산당을 몰아내면 자신은 정치에 손을 떼고 군사 업무만 관장하겠다고 합작을 제안했으나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그의 제안에 확답을 주지 않고 [[우한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결국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하여 독자적인 청당을 하여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고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장제스가 설마 군사정변까지 일으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왕징웨이와 [[우한 국민정부]]는 닷새가 지난 4월 17일에야 반격에 들어가 장제스를 출당시키고 장제스를 반역자이자 반혁명수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의 목에 25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 우한 쪽 인물인 [[탕성즈]]와 [[저우언라이]]는 난징을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나 [[미하일 보로딘]] 등이 북벌을 강력히 주장해서 일단 난징과의 대결은 접어두고 왕징웨이는 4월 19일 2차 북벌을 선포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27년 7월 15일 이전의 왕징웨이.jpg|width=100%]]}}}|| || [[국공결렬]] 이전의 왕징웨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국공결렬)] 왕징웨이는 [[펑위샹]]과 동맹을 맺어 [[장쭤린]]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고 더 나아가 장제스의 배신에 대처하려 했지만 도리어 펑위샹은 왕징웨이를 위협해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왕징웨이가 펑위샹의 무리한 요구까지 들어주며 우한 정부에 대한 지지를 받아냈으나, 그로부터 약 10일만에 장제스가 제안한 더 달달한 조건에 넘어가 왕징웨이의 통수를 후리고 만다.] 거기에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당이 아예 국민당을 장악하기 위한 술수를 벌이는 것이 포착되자 경악한 왕징웨이는 1927년 7월 15일, [[국공결렬|국공합작 파기를 결정하고 분공정책을 취하는데]] 이후 그는 장제스보다도 더한 반공인사가 되었다. 그가 훗날 일본에 붙은 이유 중 하나도 공산당과 합작하는 항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 한편 우한 정부 역시 재정적 곤란에 시달렸고 이로 인하여 여력을 상실한 왕징웨이는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를 합병하는 조건으로 장제스의 사직을 요구했는데, 마침 [[중화민국 북양정부|북양정부]] [[장쭝창]]의 공격에다 우한 정부 [[탕성즈]]의 동정까지 겹쳐 궁지에 몰린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영한합작|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합쳐졌다.]] 하지만 [[서산회의파]]가 왕징웨이를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며 왕징웨이는 [[후한민]], [[탄옌카이]], [[차이위안페이]], [[리례쥔]]과 함께 국민정부 상임위원에, [[차이위안페이]], [[셰츠]]와 함께 특별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다. 왕징웨이는 제대로 삐진 나머지 [[천궁보]]의 설득으로 우한의 [[탕성즈]]와 손을 잡지만, 세력 확장에 눈이 먼 탕성즈가 멋대로 안휘성을 침공하다 [[당계전쟁|오히려 역으로 박살나자]] 왕징웨이는 탕성즈를 버리고 달아나야 했다. 다시 동맹자를 잃은 왕징웨이는 다시 장제스랑 손잡기로 결정, 그의 복귀를 도왔으나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고 1927년 12월 요양을 명목으로 다시 외유를 떠나고 장제스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여겨 다시 반장을 외치게 된다. 이때 이론적으로 따로 노는 경향이 있던 [[간나이광]]은 좌파에서 이탈하여 미국 유학을 떠나버리는 등 세력에 타격이 있었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930년 옌시산과 왕징웨이.jpg|width=100%]]}}}|| || [[중원대전]] 중인 1930년 9월 9일, 베이핑에서 만난 [[옌시산]]과 왕징웨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개조파)] 그러던 중 [[국민당의 2차 북벌]] 이후 [[편견회의]] 과정에서 장제스와 사이가 틀어진 군벌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1929년 2월 광서파가 [[호남 사건]]을 일으키자 장제스가 토벌을 선포, 3월에 [[1차 장계전쟁]]이 발발했고 5월에는 [[펑위샹]]이 반란을 일으켜 [[1차 장풍전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이를 모두 진압했지만 서산회의파가 꾸준히 반장세력을 지원하면서 9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켜 [[2차 장계전쟁]]이 벌어졌고 10월에 [[쑹저위안]], [[스여우싼]] 등 서북계의 잔여세력들이 봉기하여 [[2차 장풍전쟁]]이 일어났으며 12월에는 근성있게 재기한 [[탕성즈]]가 들고 일어나 [[장당전쟁]]이 일어났다. 왕징웨이는 이런 대혼란을 기회로 장제스에게 다시 도전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1928년 중 [[천궁보]] 등 측근들이 만든 [[개조파|국민당 개조동지회]]의 귀국 요청에 응하는 방식으로 1929년 10월 말 귀국하여 이들과 반장의 기치를 함께했다. 마침내 1930년 2월에 [[서산회의파]]의 [[쥐정]], [[셰츠]], 쩌우루, [[쉬충즈]] 등의 설득으로 펑위샹과 합작한 [[옌시산]]이 장제스 하야를 요구하며 반장 진영에 합류했고 4월에 [[중원대전]]이 발발했다. 왕징웨이는 8월의 확대회의에 참여, 9월 베이핑 국민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 옹호를 타전하고 나서면서 베이핑 국민정부는 11월 해체되었고 왕징웨이는 [[영국령 홍콩]]으로 달아났다. 1931년 [[탕산 사건]]이 발생하자 왕징웨이는 이번엔 [[개조파]], [[서산회의파]], 광동파, 광서파를 모두 규합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장제스에 맞섰으나 얼마 가지 않아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뒤이어 [[영월합작]]이 성사됨에 따라 난징과 광저우는 협력하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자신을 무시하는 광동파에 빈정이 상해 아예 발상을 전환, 다시 장제스와 손잡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 시기 그는 군사력으로 외교적 노력이 좌절되는 사태를 여러번 목격하였고 결국 이로 인한 절망은 [[반제국주의]]를 추구하는 대신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비틀어지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