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윤 (문단 편집) === 초기 생애 === [[병주]]의 태원군 기현[* 현(現) [[산서성]] [[진중시]]의 일부] 출신이다. 병주에서 등용되어 소신있고 깨끗한 인물로 명성을 떨쳤다.[* [[순욱]]의 별명으로 알려진 '''[[왕좌지재]]'''라는 말로 먼저 불린 사람이다. 그 말대로 본인은 [[왕좌지재]]에 어울리게끔 일을 했으나, '''[[영제(후한)|황제]]가 막장'''이었다.] 왕윤의 명성을 들은 [[삼공]] 모두가 그(= 왕윤)를 추천하여 시어사가 되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수로 등용되어 여러 차례 [[황건적]]을 격파했으며, 도중에 [[십상시]]와 황건적이 내통하고 있었다는 편지를 입수하여 십상시를 고발한다. 황제는 진노했지만 [[환관]]들의 아부에 그만 그들을 용서해주었고, 왕윤에게 원한을 품은 환관들은 오히려 왕윤에게 거짓죄를 덮어씌워서 죽이려 했다.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지인들이 독약을 보내 자결할 것을 권했지만 왕윤은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으나 여러 공경들의 탄원이 있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에 환관들의 보복을 피해 잠적하여 사예주 일대를 유랑했다고 한다. 이후 환관들과 대립하게 된 대장군 [[하진]]에게 재등용되어 종사중랑 하남윤이 되었다. 하진이 환관들에게 암살당한 뒤 반환관파의 대표가 된 [[원소(삼국지)|원소]]의 반격으로 궁궐이 점령되어 환관들이 [[후소제(후한)|소제]]와 [[헌제|진류왕]]을 데리고 궁궐 밖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원소를 지원하기 위해 하남중부연 [[민공]]을 보냈다. [[동탁]]이 군사력으로 정권을 잡자 동탁에게 중용되어 [[삼공]]의 하나인 사도가 되었다. 동탁은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로 명성이 높은 왕윤을 중용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했던 것이다. 왕윤은 실력으로는 동탁에 맞서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인지, 일단은 동탁 정권에 협조적으로 행동했으며, 동탁도 겉으로는 협조적으로 나오는 왕윤에게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동탁 측에 붙은 것은 아니고 동탁에게도 어느 정도 쓴소리를 하면서 양심적인 면모를 보였던 모양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당시 황제와 여러 조신들은 왕윤 밖에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동탁의 무자비한 장안 천도 과정에서 서적들을 보호하여 진귀한 도서들이 소실되는 것을 막았다. 사실 동탁 집권 초기 왕윤이 동탁 정권에 협조적으로 행동한 것이 왕윤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흠결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십상시|환관 세력]]'''과 '''[[하진(삼국지)|하진]] + 청류파 = 반(反) 환관 세력'''이 박치기 끝에 둘 다 날아가버린 당시 상황에서 조정(= 중앙 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쨌건 군사적 기반을 갖춘 세력가가 필요했고, 동탁이 한나라의 신하로 남아있는 동안에는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동탁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동탁에게는 [[갑툭튀|갑툭]]해서 벼락출세한 변방 [[군벌]] 출신에 정당성이 부족한 집권 과정, 정권 장악 이후의 폭정 및 특히 ([[유교]]적 세계관으로는 거의 정당화가 불가능한) 신하로써 집권하자마자 황제를 갈아치움 같은 많은 정당성의 흠결이 있었지만 이 당시 한나라 조정이 겪고 있던 심각한 혼란과 권위 실추를 생각하면 왕윤(이 대표하는 [[한나라]] 충성파) 입장에서도 얘는 이래서 싫고 쟤는 저래서 싫다고 입맛대로 고를 수 있을 만큼 여유있는 처지는 아니었고 조정을 지탱해 줄 다른 대안 역시 당장은 막막한 상황이었으니, 동탁이 가진 무수한 흠결들도 조정의 권위를 지탱하는데 공헌하기만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할 부분으로 여길만 했던 것이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보면 동탁은 공공연하게 찬탈의 야심을 드러냈으니 이 시기 왕윤의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역시 결과적으로 보면 그래서 그 동탁을 날려버린 건 결국 왕윤이다. 결국 왕윤의 가장 큰 정치적 특징으로 꼽히는 것이 원칙론과 강직함이지만, 그 역시 한나라 조정의 유지와 재건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한 현실정치가로써의 측면 역시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 다만 (하술된 것 처럼) 동탁 제거 후 정세 판단에 실패함으로써 그의 한나라 재건 드라이브는 최종적으로 실패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